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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도덕경’ 펴낸 김정탁 교수 "모범답안 가지고 인생 살지 말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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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범답안을 가지고 인생을 살지 말자. 거기에 집착하다 보면 진정한 자신을 잃게 된다.”

7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중앙일보 본사에서 김정탁(67) 성균관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2019년에 그는 4년의 집필 기간을 거쳐『장자』를 출간한 바 있다. 그리고 2년 만에 노자의 『도덕경』을 최근 출간했다. 장자에 이어 노자, 노장 사상을 통째로 아우른 셈이다. 김 교수는 “산업화 시대에는 유가(儒家)의 사상이 필요했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노장의 사상이 맞아떨어진다”고 강조했다. 그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무려 2500년 전에 쓰인 글이다. 오래된 글을 지금 왜 읽어야 하나.  
“사람에게는 꿈이 있다. 그 꿈을 멋지고, 즐겁고, 자연스럽게 구현하는 길이 여기에 담겨 있다. 그걸 찾고자 한다면 『도덕경』을 읽기를 권한다.”
제목이 『도덕경』이다. 도(道)가 무엇인가.
“도는 우주 자연의 원리를 말한다.”
그럼 덕(德)은 뭔가.  
“덕은 우주 자연의 원리가 만물에게 구현된 모습이다. 다만 사람에 한해서 그 덕을 선(善)이라고도 한다.”
학창 시절, 다들 도덕 과목을 배웠다. 그렇지만 그 뜻을 정확히 몰랐다. 그럼 ‘도덕’은 우주 자연의 원리를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 구현하는 걸 말하나.
“그렇다. 노자의 『도덕경』은 그걸 말하고 있다.”
아무 책에나 ‘경(徑)’자를 붙이진 않는다. 불경ㆍ성경 등 진리를 담은 책에만 ‘경’자가 붙는다. 노자의 저술에는 왜 ‘경’자가 붙었나.
“당나라 현종이 노장 사상에 심취했다. 이 책의 원래 텍스트 이름은 그냥 ‘노자’였다. 현종이 여기에 ‘경’자를 붙여서 『도덕경』으로 올렸다. 현종은 장자의 『장자』도 ‘경’자를 붙여서 『남화경(南華經)』으로 올렸다. 그는 노자의 저작에 우주 자연의 진리가 담겼다고 본 것이다.”
당나라 때 중국은 전성기를 구가했다. 국제무역도 활발했다. 노장 사상과 관련이 있나.
“밀접한 관계가 있다. 노장 사상은 기본적으로 중앙집권이 아니라 자유방임이다. 당나라도 그랬다. 겉으로는 유가를 표방했지만, 속으로는 노장 사상의 영향이 강했다. 경제로 치면 계획경제가 아니라 자유방임경제다. 이게 노장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과 통한다.”

김정탁 교수는 “노장의 무위자연 사상에는 ‘자연스럽다’는 키워드가 담겨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 자연스러움이 ‘작은 정부’ ‘소박한 나라’로 이어진다고 했다. 김 교수는 “서양에서는 자연을 ‘네이처(Nature)’라고 부른다. 명사의 개념이다. 동아시아에서는 달랐다. 자연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 혹은 부사의 개념이었다. 자연에는 글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풀었다.

이어서 김 교수는 “하루만 해도 밤낮이 교대하고, 1년이면 사계절이 교대한다. 그게 무위하게 이루어지기에 ‘자연스럽다’고 말한다. 그런데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이 사는 사회에도 이게 필요하다”고 풀었다.

인간이 사는 사회에 왜 ‘무위자연’이 필요한가.
“자연에는 키 큰 동물도 있고, 키 작은 동물도 있다. 몸집이 큰 동물도 있고, 작은 동물도 있다. 지능이 우수한 동물도 있고, 떨어지는 동물도 있다. 이 전체가 하나의 조화를 이루는 걸 ‘자연스럽다’라고 말한다. 그게 무위자연이다. 그런데 이걸 인위적으로 똑같이 평준화하면 문제가 생긴다.”
어떤 문제가 생기나.
“예를 들어 오리와 학은 다리 길이가 다르다. 그런데 오리 다리가 짧다고 늘리면 어찌 되나.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면 어찌 되나. 노장 사상은 오리와 학의 다리를 있는 그대로 보라고 말한다. 어느 사회든, 어느 숲이든 다리 길이가 똑같은 동물만 사는 곳은 없다. 반면 마르크스주의나 사회주의는 인위적인 평준화를 지향한다. 사회를 계급으로 나누고, 갈등과 투쟁을 필연으로 본다. 또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 다시 말해 자연스러움을 제한한다. 노장 사상은 이와 다르다.”
노장 사상은 어떻게 다른가.
“오히려 자연스러움을 추구한다. 오리의 다리, 학의 다리를 인정하고 공동체 전체의 조화를 중시한다. 오리의 다리가 짧고, 학의 다리가 길다고 해서 자르지 않는다. ‘나는 옳고 당신은 그르다’며 무턱대고 공격하지도 않는다. 그런 식으로 자기 진영의 정치적 이익만 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진영보다 우리 공동체 전체의 이익과 조화를 중시한다. 그걸 ‘화리(和理)’라고 부른다.”

말은 쉽다. 그러나 국가와 사회에선 다수의 이해 관계가 충돌한다. 이런 큰 울타리 안에서 화리의 지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사회과학을 가르치며 늘 강조한 게 있다. 국가 전체로 보면 문제의 해결점이 안 보일 때가 많다. 그걸 최소 단위로 줄이면 의외로 해결점이 보인다. 가령 국가와 국가, 사회와 사회 단위의 문제는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해법이 안 보인다. 그걸 나와 친구 사이로 치환하면 금방 해결책이 나온다. 그러니 우리 공동체의 문제를 가족의 문제로 먼저 생각하자. 거기서 해결책이 나오면 사회ㆍ국가의 문제에서도 해결책이 나오게 마련이다.”

인터뷰를 하던 김정탁 교수가 『도덕경』을 펼쳐보이며 "세상 사람 모두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을 (나도) 아름답다고 아는데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대목을 설명하고 있다.

인터뷰를 하던 김정탁 교수가 『도덕경』을 펼쳐보이며 "세상 사람 모두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을 (나도) 아름답다고 아는데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대목을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김 교수는 ‘오솔길’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도(道)는 원래 형이하학적 개념이었다”고 강조했다.

도(道)는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용어 아닌가.  
“그렇지 않다. 도는 처음에 그냥 걸어다니는 길이었다. 산에 올라가서 지나온 오솔길을 돌아보라. 그 길은 정말 이상적인 길이다.”
산에 난 오솔길이 왜 이상적인 길인가.
“정상까지 갈 때 가장 빠르면서도, 가장 힘들지 않은 길이 뭔가. 그게 오솔길이다. 우리가 직선으로만 산에 오르면 얼마나 빠르겠나. 그런데 힘들어서 못 간다. 적당히 휘면서, 적당한 속도로, 적당한 숨 가쁨으로 올라가는 길. 그게 오솔길이다. 일부러 만든 유위(有爲)의 길이 아니다. 사람들이 자꾸 다니다 보니까 저절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무위(無爲)의 길’이다. 가장 자연스럽고 이상적인 길이다. 이게 서양과의 차이점이다.”
서양과 어떻게 다른가.
“서구에서는 진리를 형이상학의 범주 안에서만 찾으려 한다. 신(神) 혹은 이데아를 통해서 말이다. 동아시아는 다르다. 길이란 형이하학적 개념을 통해 형이상학을 전개했다.”  
『도덕경』은 결국 길을 말하나.
“그렇다. 『도덕경』은 천도(天道)와 인도(人道), 그리고 치도(治道)를 다룬다. 서양의 학문에서 보면 천도는 자연과학, 인도는 인문과학, 치도는 사회과학이다. 이 셋이 각각 독립적이다. 동아시아 학문은 다르다. 천도에 입각해 인도와 치도를 풀이한다. 그 인도와 치도에는 인간이 가야할 길,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바가 담겨 있다. 그래서 『도덕경』이 우리에게 길잡이가 된다.”
 『도덕경』이 말하는 무위자연. 한마디로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결국 욕심을 내려놓으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욕심을 내려놓고 최선을 다해라. 그리고 결과를 받아들여라.”
그렇게 하면 어찌 되나.
“마음이 편해진다. 자연을 봐라.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온다. 그걸 알면 내게 슬픔이 와도 좌절하지 않는다. 기쁨이 올 거라는 걸 아니까. 낮이 가면 밤이 오듯이. 또 즐겁더라도 거기에만 빠지지 않는다. 머지않아 괴로움이 온다는 것을 아니까. 이걸 알면 삶의 진폭이 줄어든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까 이렇게 진폭이 줄어든 삶, 그게 행복한 삶이더라.”
마지막으로 『도덕경』에서 딱 한 구절만 꼽는다면.
“‘희언자연(希言自然)’이다. 자연은 말이 적다는 뜻이다. 그래서 노자는 ‘회오리바람은 아침 내내 불지 않고, 소나기는 온종일 내리지 않는다’고 했다. 바람과 비가 아무리 좋아도 자연은 스스로 절제할 줄 안다. 인간은 반대이다. 언어가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아주 유용하고 편리하다고 해서 언어를 입에 달고 다닌다. 그래서 침묵으로 흘려보낼 얘기도 굳이 말로 표현하려고 한다. 게다가 말로 표현하면서도 담백한 언어보다는 감미료가 듬뿍 뿌려진 과잉언어를 즐겨 사용한다. 그래서 말이 거칠어진다. 음식에 인공감미료가 뿌려지면 몸이 상하지만, 언어를 인공감미료로 덮으면 마음이 상한다. 그러니 여기서 소통을 기대할 수 없지 않은가.”

글=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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