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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혜리의 시선

경찰 믿을 수 있나, 한강 의대생 사건이 묻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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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한강공원에서 숨진채 발견된 손정민씨 아버지 손현씨가 어버이날인 지난 8일 시신을 발견한 차종욱 민간구조사를 만난 후 눈물을 흘리고 있다. 뉴스1

한강공원에서 숨진채 발견된 손정민씨 아버지 손현씨가 어버이날인 지난 8일 시신을 발견한 차종욱 민간구조사를 만난 후 눈물을 흘리고 있다. 뉴스1

'정민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게 일어날지도 모르는 문제를 경찰이 해결할 수도,경찰을 믿을 수도 없다는 게 문제다. '
지난달 한강에서 숨진 채 발견된 의대생 손정민 씨 관련 한 유튜브 영상에 붙은 이 댓글은 이번 사건에 여론이 왜 이렇게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멀쩡하게 친구 만나러 나간 아들이 실종 5일 만에 차디찬 강물 속 시신으로 발견되는 과정을 온 국민이 지켜본 셈이니 감정이 이입될 수밖에 없다. 내 가족이 당장 오늘이라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 여기에 경찰은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이 더해져 안타까운 젊은 죽음에 대한 추모를 넘어 광적인 여론재판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경찰 향한 불신, 음모론으로 번져 #'방구석 명탐정 코난' 등장 배경 #메이필드 사건 반면교사 삼아야

성난 여론은 의심스런 정황만으로 실종 당일, 같이 술 마신 친구를 살인범으로 단정한다. 관련 기사마다 '온 국민은 진실을 알고 있다'는 댓글을 쏟아내며 정의의 이름으로 집요한 신상털이를 한다. 여러 의혹을 제기한 피해자 아버지조차 "단순 실족사든 타살이든 진실이 밝혀지기만 한다면 다 받아들이겠다"는데, 여론은 '사고사로 결론 나면 촛불집회를 열겠다'며 경찰을 압박한다.

대중적 관심이 쏠린 사건 관계자를 향한 과도한 여론재판이 문제가 된 게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피해자 가족과 일면식도 없는 제3자가 '억울해서 잠이 안 온다'며 청와대 청원까지 올리는 건 낯선 광경이다. 그간 봐오던 피해자 유족과 달리 차분하고 치밀하게 여론전을 주도하는 엘리트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호감도 분명 작용했을 거다.

그러나 경찰에 대한 불신 심리가 더 큰 게 아닌가 싶다. 사건 초기, 친구의 가족이 경찰 고위 간부라는 루머가 나온 것도 이런 맥락이다. 경찰이 연루된 비리 사건은 어느 정권이나 늘 있어 왔지만, 특히 이 정부 들어 경찰에 대한 불신이 크다. 이용구 법무차관 택시기사 폭행 사건처럼 경찰이 권력과 유착해 비리를 비호하는듯한 모습을 많이 노출한 탓이다. 단순 실족사이든, 아니면 친구가 술 취해 기억을 못 하는 사이 벌어진 어떤 사고든 '기다리면 진실을 마주할 수 있다'는 믿음 대신 '가만있으면 진실은 묻힌다'는 불안이 과도한 여론몰이로 이어지는 한 배경이라는 말이다.

경찰이라고 할 말이 없지는 않다. 일부 경찰이 익명 커뮤니티 앱에 쓴 글처럼 '수사는 비공개가 원칙'이고, '언론 탄 사건을 그냥 묵히는 건 불가능'하다. 경찰은 이런 이유로 의혹을 제기하는 국민을 향해 '방구석 코난(탐정)에 빙의했다'고 조롱한다. 하지만 경찰의 반박 논리 속에 경찰을 불신할 수밖에 없는 근거가 다 들어있다.

지난 11일 구미 3세 아이 사망 사건 초기 외할머니로 알려졌다 경찰이 친모로 바로잡은 A씨가 2차 공판 참석차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경찰은 수사 내내 사건 본질과 무관한 사안을 언론에 흘렸다. 변호사는 "구체적 증거없이 추측만 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뉴스1

지난 11일 구미 3세 아이 사망 사건 초기 외할머니로 알려졌다 경찰이 친모로 바로잡은 A씨가 2차 공판 참석차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경찰은 수사 내내 사건 본질과 무관한 사안을 언론에 흘렸다. 변호사는 "구체적 증거없이 추측만 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뉴스1

멀리 갈 것도 없이 이제 막 재판을 시작한 경북 구미 3세 아이 사망 사건만 봐도 그렇다. 아이가 빈집에서 미라로 발견될 때까지 방치한 부모의 아동학대를 제대로 수사하기보다 사건 본질과 무관한 시시콜콜한 수사 내용을 마구잡이로 공개하면서 사건을 엽기적인 치정물로 변질시키지 않았나. '외할머니가 사실은 그 아이의 친모'라고 단정했지만 당사자가 부인하는 출산 증거는 찾아내지도 못했다.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외도 남성을 찾겠다고 택배기사를 비롯해 20여 명의 DNA를 검사한 사실까지 까발렸다. 이처럼 경찰이 수사 내용을 선택적으로 공개하니, 경찰을 의심하며 스스로 수사에 나선다. 또 '언론 탄 사건을 묵힐 수 없다'는 말은 '언론 안 타면 묵히기 쉽다'는 고백이나 마찬가지인데, 이게 일반 국민으로선 더 공포스럽다. '유족에게 배경·재산이 없었다면 경찰이 제대로 된 수사 없이 실족사나 자살로 사건을 덮었을 것'이라며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는 여론이 많은 이유다.

스페인에 가본 적도 없으나 정황만으로 마드리드 열차 테러 범인으로 구속됐던 브랜든 메이필드(왼쪽)가 풀려나며 웃고 있다. 그는 무고한 옥살이 대가로 미 정부로부터 200만 달러를 받았다.

스페인에 가본 적도 없으나 정황만으로 마드리드 열차 테러 범인으로 구속됐던 브랜든 메이필드(왼쪽)가 풀려나며 웃고 있다. 그는 무고한 옥살이 대가로 미 정부로부터 200만 달러를 받았다.

언론이 주목하니 그냥 묻을 수는 없겠지만 한편으로는 브랜든 메이필드 사건처럼 여론에 떠밀려 엉뚱한 사람을 범죄자로 만들지 않을까 우려스럽기도 하다. 191명이 사망한 2004년 마드리드 열차 테러 사건 직후 지문이 나왔는데, 공교롭게도 스페인엔 가본 적도 없는 미국 포틀랜드 출신 백인 변호사와 일치했다. 하필 그의 아내는 이집트 출신의 무슬림 이민자, 본인도 개종한 이슬람교도였다. 게다가 유죄 판결받은 테러범의 자녀 양육권 관련 사안을 변호한 적도 있었다. 모든 정황이 그를 범인으로 지목했고, FBI는 확실한 증거 없이 그를 구속했다. 스페인 경찰이 진범을 찾은 후에야 메이필드는 풀려날 수 있었다. 반박할 수 없는 과학적 증거라던 지문은 나중에 이례적으로 비슷한 지문으로 판명 났다. 과학조차 때론 이렇게 한계를 드러낸다.

진실을 원하는 아버지의 억울함은 꼭 풀어줘야 하고, 죄지은 자는 죗값을 치러야 한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무고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경찰이 과연 이 모든 걸 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