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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남정호의 퍼스펙티브

윤곽 드러낸 미 '대북 정책 검토'…북한 불러내기에 성패 달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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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의 퍼스펙티브 그래픽=신용호

남정호의 퍼스펙티브 그래픽=신용호

국내외의 비상한 관심을 끌어온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정책 검토 (North Korea Policy Review)'가 마침내 지난달 마무리됐다. 수 개월 간에 걸친 국무·국방부 등 관련 부처 간의 치열한 토론에다 외부 전문가들의 조언까지 고려해 마련된 이 정책 검토는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정책 매뉴얼이다. 미국이 어떤 목표를 갖고 어떻게 북한을 대할지 등등, 주요한 정책 방향과 전략이 여기에 담겨있다. 미국의 대북 관련 부처 모두가 정책 검토에서 제시한 방향으로 일사불란하게 달려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골자는 무엇이고 어떤 문제가 있는가. 간략한 백악관 브리핑과 언론 보도를 통해 희미하게나마 윤곽을 드러낸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정책 핵심과 문제점을 짚어본다.

지난달 30일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이 미국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 원 안에서 '대북 정책 검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달 30일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이 미국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 원 안에서 '대북 정책 검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북한 비핵화' 아닌 '한반도 비핵화' 
지난달 30일 필라델피아로 날아가던 미국 ………전용기 '에어포스 원'. 관심을 끌어온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정책 기조가 드러난 건 바로 이 전용기 안에서였다. 암트랙(Amtrak·미국 철도) 출범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는 조 바이든 대통령을 수행한 한 기자가 "대북 정책 리뷰가 완성됐느냐"고 묻자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이 "그렇다"고 확인해 준 것이다.
사키 대변인은 시인과 함께 이번 리뷰를 통해 결정된 미국의 대북 정책 기조를 아주 간략히 소개했다. 주요 골자는 첫째, 대북 정책의 목표는 '완전한 한반도 비핵화'이고 둘째, (트럼프식) 거대 담판이나 (오바마식) 전략적 인내 정책을 쓰지 않을 것이며 셋째, 면밀하고 실질적인 접근과 함께 외교적 해법을 모색하겠다는 것이었다.
민감한 정책 검토의 자세한 내용은 공개하지 않는 게 원칙이다. 상대가 있는 게임에서 손에 든 패를 보여주는 셈이 되는 까닭이다. 따라서 사키 대변인의 짧은 설명만 있었다면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정책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상의 '단계적 접근'
다행히 워싱턴포스트는 바로 다음 날인 지난 1일 2명의 정부 내 고위 관계자들에게서 취재한 내용을 상세히 실어 궁금증을 덜어줬다. 이 신문이 추가로 전한 핵심 내용은 이랬다. 우선 바이든 대통령은 트럼프식 '정상 대 정상 (leader to leader) 외교'와 오바마식 '거리 두기(arm's length) 외교'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접근법을 쓸 계획이라고 했다. 즉 트럼프 행정부 당시 백악관 안보보좌관이던 존 볼턴이 주장했던 '크게 가거나 아니면 집에 가라 (go big or go home)'는 식의 전략은 포기한다는 얘기다.
새로운 대북 정책과 관련,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이들이 '단계적 접근'을 시사했다는 점이다. 한 고위 관계자는 "(북한의) 특정한 행동들에 대해 보상을 해줄 준비가 돼 있다"고 설명했다. 북한이 영변 핵시설 폐쇄와 같은 의미 있는 조치를 취할 경우 제재 일부 해제와 같은 인센티브를 줄 용의가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바이든 행정부 측은 '단계적 (step by step)'이란 표현은 쓰지 않겠다고 했다. 이는 단계적 접근 방식을 사용했다 실패한 과거 정권의 부정적 이미지를 의식한 결정일 터다. 단계적 접근이 안고 있는 근본적 문제도 있다. 김정은 정권의 약속을 믿고 제재 해제와 같은 보상을 해준 뒤 북한이 이를 지키지 않으면 사태가 심각해진다.

2012년 9월 비무장지대(DMZ)를 방문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북한에 대해 '전략적 인내' 정책을 고수한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북한은 핵무기 고도화를 이뤘다. [중앙포토]

2012년 9월 비무장지대(DMZ)를 방문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북한에 대해 '전략적 인내' 정책을 고수한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북한은 핵무기 고도화를 이뤘다. [중앙포토]

이들은 아울러 새로운 대북 정책의 목표가 "미국에 대한 북한의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리로서는 예사롭게 넘길 수 없는 이야기다. 오로지 미국에 대한 위협만을 고려할 경우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폐기하겠다고 약속만 해도 바이든 행정부는 이를 대가로 제재를 풀 수 있다. ICBM 없이는 미국 본토에 대한 공격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북한의 중·단거리 미사일만으로도 핵 공격을 받게 되는 우리로서는 앞으로의 북미 간 협상을 면밀하게 따져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바이든 행정부 측은 날로 격화하는 미·중 갈등에도 불구, "북한에 대한 외교적 접근과 유엔 제재 시행 양쪽 모두에서 중국과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얼마나 통할지는 모르지만, 중국을 지렛대로 삼겠다는 얘기다. 끝으로 "토니 블링컨 국무부 장관, 로이드 오스틴 국방부 장관, 제이크 설리반 백악관 안보보좌관 및 마크 밀리 합참의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바이든 대통령에게 이 대북 정책 검토가 보고됐다"고 신문은 전했다.

'완전한 한반도 비핵화'가 최종 목표 #종전선언, 백신 정도로 나올지 의문 #북한 불응 시 '전략적 인내'로 회귀 #'보여주기식' 외교란 비판도 적잖아

지난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서 악수하는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트럼프는 북핵 해결을 위해 정상 대 정상 간 빅딜을 추진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연합뉴스]

지난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서 악수하는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트럼프는 북핵 해결을 위해 정상 대 정상 간 빅딜을 추진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연합뉴스]

대화의 문 열어둬
사키 대변인의 브리핑과 워싱턴포스트 기사에서 구체적인 협상 전략이 드러난 것은 없다. 그럼에도 행간을 통해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정책의 기조는 읽을 수 있다.
먼저 눈에 띄는 건 그간에 사용됐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 (CVID)'나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FFVD)'와 같은 복잡한 표현이 없어졌다는 점이다. 대신 '완전한 (complete) 비핵화'라는 간단한 용어가 사용됐다. 언뜻 보면 비슷한 것 같지만 실제로 들어가면 큰 차이가 있다. 예컨대 불가역적 비핵화란 북한이 핵무기 및 핵시설을 폐기한 뒤 마음을 바꾸더라도 다시 핵을 제조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북한의 핵 과학자들이 제3국으로 보내질 수도 있다. 따라서 그저 완전한 비핵화를 추구하겠다는 방침은 북한이 넘어야 할 허들을 많이 낮춰준 것이다.
미국이 그간 사용해온 '북한 비핵화' 대신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을 쓴 것도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김정은 정권은 '한반도 비핵화'라는 용어를 고집했다. 한반도 비핵화가 주한미군을 비롯한 남쪽 전역도 포괄하는 반면 북한 비핵화는 북쪽만을 대상으로 삼겠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까닭이다. 결국 '완전한 한반도 비핵화'를 목표로 삼겠다고 천명한 것 자체가 북한을 적잖게 배려한 것으로, 이는 김정은 정권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한 용어 선택이 분명하다.

어떻게 풀어내나
바이든 행정부의 '단계적 접근법'이 트럼프식 '정상 간 담판'이나 오바마식 '전략적 인내'보다 훨씬 현실적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많은 의문과 함께 회의론이 피어나고 있다. 로버트 아인혼 전 국무부 특별보좌관은 브루킹스 연구소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통해 중요한 내용이 아직 결정되지 않은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북한과 비핵화 합의를 하더라도 한 번의 합의로 전체 일정을 결정할지, 아니면 특정 단계를 마무리한 뒤 다시 협상할지를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북한이 비핵화 조치를 취했다 하더라도 이를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 역시 마련돼야 한다고 아인혼은 지적했다.
이뿐 아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최대의 걸림돌로 여겨지는 것은 단계적 접근 전략을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할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다. 현재 김정은 정권은 미국의 대화 제의에도 꿈쩍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저 "협상하자"는 말만 되풀이한들 북한이 나오겠느냐는 얘기다.

지난 5일 영국에서 열린 G7 외교장관 회의에 참석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부 장관. 블리컨은 이날 ″북한이 말 뿐 아니라 실제 행동까지 하는지 지켜보겠다″고 밝혔다. [AP=연합뉴스]

지난 5일 영국에서 열린 G7 외교장관 회의에 참석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부 장관. 블리컨은 이날 ″북한이 말 뿐 아니라 실제 행동까지 하는지 지켜보겠다″고 밝혔다. [AP=연합뉴스]

블링컨은 지난 3일 런던 G7 회의에 참석해 "북한이 외교적으로 관여할 기회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향해 전진할 방법이 있는지 살펴보길 바란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우리는 며칠, 몇 달 내에 북한이 말뿐 아니라 실제 행동까지 하는지 지켜보겠다"고 덧붙였다. 사실상 북한의 선제적 행동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김정은이 아무런 대응도 안 하면 결국 오바마 때의 '전략적 인내'와 다를 바 없게 된다. 바이든 외교안보팀은 '전략적 인내'를 실패한 정책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이를 입안한 장본인은 바로 그들 자신이다. 결국 어떻게 북한과의 대화를 시작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효과적인 액션 플랜이 없다면 아무런 성과도 기대할 수 없는 게 현실인 것이다. 북·미간 종전선언이나 연락사무소 개설 같은 손쉬운 카드부터 쓰자는 의견도 있다. 최근에는 백신 제공으로 물꼬를 트자는 이야기도 나온다. 하지만 이 정도에 북한 측이 감격해 대화에 나설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바이든 행정부가 코로나 해결 등 국내 현안과 이란 핵 같은 다른 외교 문제를 푸는 동안 북한을 조용히 시키려는 보여주기식 외교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게다가 바이든은 트럼프 시절 스티븐 비건 전 국무부 부장관이 맡았던 대북 특별대표 자리를 비워둘 것으로 알려져 이 같은 의심을 부채질하고 있다. 북한 문제가 바이든의 외교 우선순위의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는 관측도 그래서 나온다.
이 같은 불안 섞인 시각은 대북 정책 검토의 구체적 내용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편에선 대북 협상에서 유연성을 갖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결정해선 안 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어쨌든 오는 21일 문재인-바이든 대통령 간 첫 한미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어 이 자리에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북한 문제가 중요한 현안으로 논의될 게 분명한 까닭이다. 이를 통해 미국의 구체적인 대북 정책이 더 밝혀지면 앞으로 펼쳐질 한반도 상황을 보다 또렷하게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