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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가족과 산속서 초근목피로 연명한 50년전 보릿고개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191) 

어버이날 동네가 시끌벅적할 때인데 코로나로 마을회관도 못 가니 아쉬운 휴일이다. “어무이 우리도 소풍 가시더” 베풂과 나눔이 일상이신 어르신 두 분을 모시고 불난 앞산에 소풍 왔다. 한 어르신은 연신 “아이고, 험한 산길인데 차가 다닐 수 있네” 하며 이전에 살던 첩첩 산속 동네와 비슷하다고 마실 온 듯 행복해한다. 영감이 돌아가시고 마을로 내려오신 한 어른은 초가삼간 집을 구해 요리조리 고치고 손 본 집이 인형의 집 같단다. 자식 농사 잘 지으신 분으로 소문나 있고 동네 유지지만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 검소하다.

높고 울창하던 숲이 옷을 벗고 웅크리고 있는 것 같다. 언제 챙겼는지 가방에는 괭이와 함께 쑥떡과 과일 물통이 졸졸 따라 나온다. 임도에 자리를 펴고 앉아 떡이랑 과일을 먹으며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을 입으로 그린다. 남자의 군대 이야기, 여자의 아이 낳아 키우던 이야기는 평생 끝나지 않을 스토리다. 산을 두 개 넘고, 다시 시골길을 한 시간을 걸어 국민학교 다니던 50~60년 전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어르신들과 앞산으로 떠난 소풍에서 옛날 이야기가 펼쳐졌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우리의 인생이야기다. [사진 pixabay]

어르신들과 앞산으로 떠난 소풍에서 옛날 이야기가 펼쳐졌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우리의 인생이야기다. [사진 pixabay]

‘겨울이 지나고, 휭 하니 빈 들판에 꽃샘바람 깊어지면 아끼고 아껴도 보릿고개는 꼭 찾아왔제. 남편은 가족을 이끌고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갔어. 큰 바위틈에 나무로 얼기설기 움막을 지어 추위를 버티고 약초와 풀뿌리를 캐 곡기 삼아 먹이며 가족을 연명시켰지. 새벽이면 부부는 걸망을 메고 나섰고 집에 돌아오면 자식들은 지쳐 잠들어 있었지. 움직이면 배고프다고 뛰어다니지 말라는 말에 아이들은 제비 새끼처럼 서로 몸을 비비며 종일 부모 바라기를 했다. 남편의 힘든 노력에도 여덟 식구의 배는 늘 고팠지만 한 사람도 낙오된 이 없이 몇 해를 그렇게 살았다.

보리 수확이 될 즈음이면 다시 집에 내려와 자식들은 하나둘 학교에 갔고, 부부는 힘든 농사일을 다시 시작했다. 일을 마치고 해 질 녘이면 막내를 등에 업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산을 넘고 넘어 길이 시작되는 지점에 서성이며 자식을 기다렸다. 노을 속에 저 멀리 엄마가 보이면 아이 등에 멘 가방보자기가 날개같이 펄럭이며 숨이 턱에 차도록 뜀박질해서 달려와 품에 안겼다.

동생들은 개울에서 놀며 고학년이 된 큰 형을 기다렸다. 마지막에 큰아들이 나타나야 안심하고 “가자”하고 돌아섰다. 피곤해도 자식의 손을 잡고 산을 넘으면 기운이 절로 났다. 큰아들이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그 먼 길을 두 번씩 오르내렸다. 늦은 수업을 마치고 오는 아들을 마중 갈 때면 기름이 아까워 가는 길은 달빛에 의지하고 돌아올 땐 호롱불을 켰다.

가끔 아들은 학교 근처에 사는 친구네 집에서 놀다가 자고 바로 학교로 갈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밤을 꼴딱 새우고 이른 새벽 다른 자식들보다 먼저 학교로 갔다. 교문 앞에서 기다리며 아들이 친구랑 학교에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다시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키워 고등학교부터는 자식 모두 도시로 유학 보냈어. 슬프고도 아름다웠던 우리의 인생길이다. 깊은 산길을 홀로 돌아가는 상상에 울컥해졌다.

움직이는 역사책이 되어 사시는 어른을 보며 부모의 삶을 떠올린다. [사진 pixabay]

움직이는 역사책이 되어 사시는 어른을 보며 부모의 삶을 떠올린다. [사진 pixabay]

수년 전, 내가 살았던 곳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5㎞ 정도 이어지는 숲길, 그 산속에 작은 절이 생기면서 길이 넓게 포장되었다. 오막살이 빈집도 한쪽이 수용되었다. 길을 내어주고 남은 스무 평 남짓 자투리땅엔 그곳에선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문짝만한 값비싼 돌에 책 한 면을 오려 붙인 듯한 잔잔한 글자를 조각한 기념비가 서 있다. 기념비 주위를 꽃밭으로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 오래 기억이 남는 곳이다.

“아버지 000, 어머니 000, 이곳에서 초근목피를 양식 삼아 우리를 키워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잊지 않기 위해….”

첫 문장이 이렇게 시작되는데 나머지 내용이 오늘 들었던 이야기와 비슷하다. 그땐 너무 감동적이라 갈 때마다 국민 교육헌장 낭독하듯 읽었다. 움직이는 역사책이 되어 사시는 어른을 보며 부모의 삶을 생각하게 하는 5월이다.

핫, 멍하니 상념에 젖어 있노라니 두 어른이 산 중턱에 올라 나를 부른다. “여이, 여이 고사리, 잔대랑 취나물이 천지다. 빨리 올라와 봐. 빨리” 소풍 나오면서도 무릎 아프다며 노래하셨는데, 기는 것과 걷는 건 다른 건가 보다. 후덜덜. 나는 무서워서 못 올라가고 무사히 내려오시길 기다리며 이번 글을 잡아본다.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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