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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1년에 한번 와 울면서 위스키 한 잔 마시고 가는 손님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대영의 위스키 읽어주는 남자(119)

“밥은 먹었니?”

바 영업준비를 할 때면 어김없이 카톡 하나가 온다. 대답은 늘 같다.

“응.”

아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은 알지만, 바쁘다는 핑계가 한 음절 이상의 말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1960년에 증류해 54살 된 글렌파클라스 위스키. [사진 김영동]

1960년에 증류해 54살 된 글렌파클라스 위스키. [사진 김영동]

“아저씨 안녕하세요!”

“나이 차도 얼마 안 나는데 이제 슬슬 호칭을 바꿔보는 건 어때요? 마스터라든지….”

“그건 별로 맘에 안 들어요~! 아저씨가 더 좋은데….”

“알겠습니다. 손님이 원하신다면. 오늘은 뭘 드릴까요?”

“오늘은 좀 달콤한 게 마시고 싶네요!”

백바로 몸을 돌린다. 달콤한 거라면 지난번에 마셨던 글렌모렌지 넥타도르 같은 소테른와인캐스크 숙성 위스키가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뭔가 새로운 걸 시도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고….

글렌파클라스 위스키는 보관 중인 위스키 가운데 몸값이 가장 비싸다. [사진 pikrepo]

글렌파클라스 위스키는 보관 중인 위스키 가운데 몸값이 가장 비싸다. [사진 pikrepo]

“끼이익~”

30대 초반 정장 차림의 남자가 들어왔다. 말끔한 헤어스타일과 옷차림이지만 그의 얼굴엔 정돈되지 않은 감정이 서려 있다.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 같은 손님을 늘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길 찾는 것도 오늘로 세 번째네요.”

“제가 어떻게 손님을 잊을 수 있을까요? 처음 가게를 열었을 때 가장 비싼 위스키를 사주신 손님인데.”

“저기 저 아가씨도 같이 한 잔 부탁드립니다. 물론 언제나처럼 마스터도요.”

“예, 알겠습니다.”

백바 깊숙한 곳에서 위스키를 꺼내기 위해 앞쪽 보틀들을 하나씩 내려놓는다. 백바 가장 높은 곳, 가장 안쪽에서 위스키 한 병을 꺼내 세 잔을 따른다.

“글렌파클라스 패밀리캐스크 1960빈티지입니다.“

“작년보다 향이 더 좋아진 것 같네요.”

“이건 저쪽 손님이 드리는 겁니다. 글렌파클라스라는 증류소에서 만든 건데, 이건 좀 특별한 위스키죠.”

“와!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향이 너무 좋아요. 달콤한 건포도와 초콜릿 같은 느낌이 드는데…. 좀 오래 맡고 있으면 나무 향도 올라오는데 엄청 부드러운 느낌인데요?”

“제가 가진 위스키 중에 가장 몸값 나가는 녀석입니다. 팔기보다는 관상용 정도로 생각하고 사둔 건데 2년 전에 저분이 사가셨어요. 1960년에 증류해 2014년에 병입했으니까 54살 위스키네요.”

“네? 위스키를 그렇게 오랫동안 숙성할 수도 있는 거예요?”

“글렌파클라스 증류소는 아직 가족경영을 이어가고 있는 몇 안 되는 증류소 중 하나입니다. 2007년부터 매년 패밀리캐스크를 내놓고 있습니다. 글렌파클라스 숙성창고에 있는 오크통 중에서 훌륭한 맛을 내는 것만 골라서 출시하죠.”

“그럼 되게 비쌀 것 같은데….”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이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 이 위스키를 마시며 한 사람을 같이 기억해주기만 하면 됩니다.”

1년에 한번 찾아오는 그 손님은 어머니가 생전에 위스키를 즐겨 드셨다고 했다. 아버지를 먼저 보낸 어머니는 홀로 그와 동생을 키웠다.[사진 pxhere]

1년에 한번 찾아오는 그 손님은 어머니가 생전에 위스키를 즐겨 드셨다고 했다. 아버지를 먼저 보낸 어머니는 홀로 그와 동생을 키웠다.[사진 pxhere]

조용히 위스키를 마시던 그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오늘도 울고 말았네요. 1년에 한 번 찾아와 울면서 딱 한 잔만 마시고 가는 손님, 참 밉상이죠.”

“아닙니다. 덕분에 늘 곁에 있어 소중한지 모르는 사람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걸요.”

그녀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위스키에는 입도 대지 않은 채, 그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다.

“저기…. 실례가 아니라면 왜 우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이 위스키에 무슨 사연이라도 있으세요?”

“3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고 하시더니 쓰러지고 다시 못 깨어나셨어요. 정말 갑작스러운 일이었죠.”

“제가 괜한 걸 물어봤네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사실 제가 이 바에 오는 이유가 그 때문인 걸요. 오늘은 마지막으로 어머니와 대화를 나눴던 날이에요. 어머니와 대화할 수 없다는 걸 상상이라도 해보셨나요? 아마 없으시겠죠. 저도 그랬으니까요. 공기 같더라고요. 사라지면 숨이 막히고 죽을 것 같죠. 있을 때는 그 소중함을 전혀 모른 채 살지만요.”

“저도 어머니께 잘해드려야 한다는 생각만 하지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없는 것 같아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무것도 손에 안 잡혔어요. 중요한 시험이 있었는데 그런 게 무슨 필요가 있겠냐며 매일 술만 마셨죠. 그러다 어머니 품이 너무 그리운 거예요. 그래서 안방 장롱을 열고 닥치는 대로 어머니 옷을 꺼내 온몸을 감아버렸죠. 잠이 깨고 술이 깨서 옷이 사라진 장롱 안을 봤는데, 글쎄 반 정도 빈 술병이 놓여있었어요. 발렌타인 12년이었죠.”

발렌타인 12년. [사진 위스키베이스]

발렌타인 12년. [사진 위스키베이스]

“어머니가 위스키를 좋아하셨나 봐요. 그래서 어머니를 추억하면서 이 위스키를 드시는 거예요?”

“어머니가 위스키를 좋아하는지 전혀 몰랐어요. 술은 입에 대지도 않으셨거든요. 술을 못 마시는 체질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아버지가 몰래 숨겨놓은 술인가요?”

“아니요. 저희 아버지는 제가 다섯 살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 혼자 저와 제 동생을 키우셨죠.”

“그럼….”

“이모가 말해주시더군요. 아버지가 미군 부대에서 일하면서 위스키를 접하는 기회가 많았다고. 어머니와 데이트할 때 위스키를 자주 드셨고, 어머니도 위스키에 빠졌다고 합니다. 저희 집에 위스키도 꽤 많았었나 봐요.”

그가 잔에 남은 위스키를 다 마신 뒤 한동안 잔에 코를 갖다 대고 잔향에 집중하다 말을 잇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며칠 뒤, 어머니가 이모에게 집에 있는 위스키를 다 주셨다고 해요. 이제 어린 자식 둘을 책임지려면 술에 취할 수 없다고 하시면서.”

“그럼 그 발렌타인은….”

“참고 또 참다가 도저히 참기 힘들 때 한 잔씩 드신 것 같아요. 알아보니 90년대 말에 유통되던 발렌타인이라고 하더군요. 20년 가까이 좋아하던 술을 멀리하고 고작 반병으로 버티신 겁니다. 오직 저와 제 동생을 위해서요.”

다시 한 번 그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이번에는 흘리지 않기 위해 재빨리 손으로 눈가를 훔친다.

“정말 맛있는 위스키를 어머니께 드리고 싶었어요. 위스키가 뭔지도 몰랐지만, 정말 최고의 위스키를 어머니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 위스키를 찾아낸 거예요. 저희 어머니와 동갑인 1960년생인 이 위스키를.”

“서울에 있는 거의 모든 바를 찾아다녔다고 하셨죠? 1960년에 증류한 위스키를 찾아서….”

“마스터에겐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 귀한 걸 두 병 모두 팔아주셨으니까요.”

“네? 두 병이라고요? 그럼 다른 한 병은 어떻게 하셨어요?”

“어머니 산소에 가져갔습니다. 절을 하고 병을 따서 산소에 모두 부었어요.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요.”

어머니와 같은 나이의 위스키를 찾아 헤매던 그 손님은 이 바에 있던 1960년생 글렌파위스키 2병을 산 후 한병은 어머니 산소에 뿌렸다. [사진 pixabay]

어머니와 같은 나이의 위스키를 찾아 헤매던 그 손님은 이 바에 있던 1960년생 글렌파위스키 2병을 산 후 한병은 어머니 산소에 뿌렸다. [사진 pixabay]

“어머니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면 팔지 않았을 겁니다. 손님이 제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바에 있는 모든 위스키를 살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저는 그런 용도라면 얼마든지 팔아도 되겠다 생각했죠.”

“감사합니다. 이렇게라도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걸 찾아드리고 싶었어요. 생전에 못 해 드린 게 한이지만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년에 뵙겠습니다. 그때까지 술 잘 보관해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참, 말씀드리는 걸 깜빡했네요. 얼마 전에 보니 술이 조금 줄어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이 술이 꽤 맘에 드셨나 봐요. 잠시 하늘에서 내려와 한잔하고 가신 거 같습니다.”

글렌파클라스(Glenfarclas) 증류소

게일어로 "푸른 잔디가 우거진 골짜기"를 의미하는 글렌파클라스는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스페이사이드 지역에서 1836년 창업했습니다. 스코틀랜드 증류소의 절반 이상이 모여있는 이 곳은 깨끗한 공기와 물이 풍부하며, 위스키의 원재료 보리의 주요 산지입니다. 또 위스키를 만들 때 사용되는 피트도 풍부해서 위스키 생산에 아주 적합한 지역입니다.

1865년 그랜트 가문이 증류소를 구입한 후, 6대에 걸쳐 가족 경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스페이사이드 스타일 위스키를 고집하는 증류소입니다. 시대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직한 증류소에서 생산되는 위스키는 전세계 위스키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위스키 인플루언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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