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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 알수록 한국에 취한다” 전통주에 빠진 日 사케 전도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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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전주 막걸리 공장을 방문한 추조 가즈오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장. 넥타이를 들어보이고 있는데, 술을 빚는 재료인 쌀과, 술병이 그려져 있어서다. 술 문화 탐방인만큼 일부러 이 타이를 골랐다고. 전수진 기자

전주 막걸리 공장을 방문한 추조 가즈오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장. 넥타이를 들어보이고 있는데, 술을 빚는 재료인 쌀과, 술병이 그려져 있어서다. 술 문화 탐방인만큼 일부러 이 타이를 골랐다고. 전수진 기자

추조 가즈오(中條一夫)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장의 술 사랑은 각별하다. 사케와 쇼츄(일본 소주) 소믈리에 자격증까지 보유했을 정도로 술에 진심인 편. 외교란 상대의 마음을 얻는 기술이자 예술이고, 그 최고의 도구 중 하나가 술과 음식 문화라고 굳게 믿는다. 그렇다고 그가 말술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선 이내 발그레 물든 얼굴이 된다. 그러면서도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더 일본 술의 맛과 멋을 전하려 애쓰는 게 그의 특징이다. 그런 그가 최근에 탐닉하고 있는 게 있으니, 한국 전통주, 그중에서도 막걸리다.

추조 가즈오 주한일본 공보문화원장 #전주 공장·골목 누비며 술 탐험 #“전통주 알수록 한국에 취하게 돼”

지난 3일엔 바쁜 일정을 쪼개 1박2일로 전북 전주에 나 홀로 출장까지 다녀왔다. 그가 최근 서울의 모 한국 전통주 상점에서 만난 ‘막걸리 파우더’라는 상품에 반했기 때문이다. 제품 뒤에 적힌 공장 전화번호로 무작정 연락을 했고, 견학 일정을 잡았다. 지난해 서울에 부임한 뒤 첫 한국 전통주 탐험에 동행했다.

누룩을 보며 "이것 좀 보세요"라고 손을 내민 추조 원장. 전수진 기자

누룩을 보며 "이것 좀 보세요"라고 손을 내민 추조 원장. 전수진 기자

“갑자기 전화를 받아서 얼마나 놀랐는데요. 무슨 문화원장이라고만 들었는데 일본문화를 대표하는 외교관이 직접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전북 전주 덕진구에서 막걸리 공장 겸 연구소를 운영하는 주민선 대표 얘기다. 주 대표에게 한국 막걸리 특유의 고두밥과 누룩, 발효 과정을 듣는 추조 원장은 하나라도 놓칠세라 메모를 하고 영상을 촬영하는 열성을 보였다.

당화(糖化)에 인공감미료인 아스파탐 등 전문용어가 쏟아졌지만 이미 소믈리에 자격증인 추조 원장은 막힘이 없었다. 발효에 중점을 둔 이 공장의 막걸리를 일본식 탁주인 니고리자케(濁り酒)와 비교한다던지, 누룩과 쌀의 배합에 따라 향미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등 전문가 뺨치는 질문 세례가 이어졌다.

그는 “막걸리 제조의 전통을 다양하게 변주하려는 모습이 인상적”이라며 “한국도 일본도 전통문화엔 장단점이 모두 있기 마련인데 장점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전주 막걸리 골목을 찾아 가죽나물전이며 파김치, 홍어 삼합 등에 곁들여 막걸리를 다양하게 맛봤다. 미리 준비해 온 일본 사케도 한 병 꺼내 즉석 한ㆍ일 술 문화 교류의 장이 마련되기도.

추조 원장이 직접 빚은 동동주를 점검하고 있다. 전수진 기자

추조 원장이 직접 빚은 동동주를 점검하고 있다. 전수진 기자

추조 원장이 처음부터 술에 일가견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는 일본 남부 후쿠오카(福岡) 출신으로 도쿄대를 졸업 후 외무고시를 패스하며 정통 엘리트 외교관 코스를 밟은 모범생 타입이다. 그러다 벨기에에 부임하며 술을 활용한 외교에 눈을 떴다.

그는 “일본 술과 음식 문화를 알리고 싶은데, 상대에게 무작정 ‘우리 게 좋으니 사케를 마시고 스시를 드셔주세요’라고 할 수 없더라”며 “유럽의 와인과 일본의 술을 함께 공부하면서 접점을 찾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다 소믈리에 자격증까지 보유하게 됐다고. 그는 “한국에서도 막걸리는 물론 경주법주 등 다양한 전통주에 대해 공부해나갈 것”이라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이 정리되는대로 갈 누룩 공장이며 전통주 명가 명단을 들려줬다.

이번 전주행에선 직접 동동주를 빚는 체험도 했다. 전주 한옥마을의 전통술박물관에서다. BTS 역시 동동주 빚기 체험을 했던 곳이다. 밥알이 으깨지지 않도록 조심히 손바닥으로 눌러가면서 누룩과 고루 섞일 수 있도록 약 30분을 만져가면서도 그는 시종일관 진지했다. 밥을 살짝 발효시켜 누룩과 섞어 향을 강화하는 방법인 작주부본 등 어려운 용어 설명이 쏟아졌다. 한국어가 유창한 편이지만 때론 정확한 설명을 다시 요청하는 그가 한국 전통주 박사가 되는 건 시간문제일 듯하다. 전주 특유의 모주는 물론 배ㆍ생강을 넣은 전주 이강주 등을 고루 조금씩 음미했다. 소믈리에가 와인을 시음할 때처럼 잔에 코를 가까이해서 향을 즐긴 뒤 입에 한 모금을 머금고 입안에서 돌리며 술의 텍스처를 느낀 뒤 목으로 넘겼다.

박물관 관계자는 “한국 전체 술 소비량 중에서 전통주는 0.4% 정도에 그치는 게 현실인데, 정작 우리나라 사람보다 일본인이 우리 전통주에 관심을 갖는 모습이 인상적”이라며 “최근 일본 정부가 일본 술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올리겠다는 목표를 세운 것도 우리 한국 전통주 관계자들로선 부럽다”고 말했다. 실제로 일본은 사케 세계화에 팔을 걷어붙였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가 지난달 28일 국회에 출석해 “일본 사케와 쇼츄를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도록 추진하겠다”고 언급하면서다.

그 사이, 추조 원장은 박물관 기념품 코너에서 판매하는 누룩 제품의 뒤에 적힌 공장 전화번호를 살펴보며 “여기도 가고 싶다”고 메모 중이었다. 그는 “한국 전통주를 알아갈수록 한국 문화의 매력에 다양하게 취하게 된다”며 “앞으로도 한국 전통주와 일본 술로 외교의 또다른 길을 개척하고 싶다”고 말했다.

전주=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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