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최훈 칼럼

워싱턴에선 ‘대한민국 대통령’이어야 한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최훈 기자 중앙일보 주필
최훈 편집인

최훈 편집인

조 바이든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의 워싱턴 회담이 열흘 뒤다. 바이든의 미국과 한국 지도자가 처음 만나 동맹과 국제적 이슈 대응을 리셋할 소중한 시점이다. 기대와 함께 “이견 증폭만 없기를 바란다”는 불안이 공존한다. 왜일까.

‘인권 십자군’ 민주당 골수 바이든 #통 큰 대북 호혜 재촉, 조급은 실패 #굳건한 동맹, 완전 비핵화 공조 등 #자유민주주의 가치의 공감이 최선

우선 바이든의 컬러. 그는 1973년 상원 입성 후 40여 년을 워싱턴의 인사이더로 활약한 골수 민주당원이다. 민주당의 뼛속 가치는 인권, 인종 평등, 여성 보호, 깨끗한 물과 공기 등 환경, 공평과세, 연금보호, 의료보험, 명분 없는 전쟁(베트남·이라크)에의 혐오다. 그 모든 출발점은 ‘인권’. 민주당의 십자군적 자세로 볼 때 그에게 설교하거나 가르쳐 북한에 통 큰 호혜를 베풀어달라는 조급증은 성공 확률 제로다. 79세 노(老)정치가가 천착해 온 ‘원칙’에 관한 문제다.

상원 외교위원장을 지낸 바이든의 외교 스타일 역시 명료하다. 1979년 바이든이 미 상원 대표단장으로 크렘린궁에서 소련의 브레즈네프 서기장, 코시긴 총리와 마주했다. 코시긴이 “역사상 핵무기를 쓴 나라는 미국뿐이다. 당신들이 먼저 우리에게 핵을 쓰지 않을 것이라 믿지 않는다”며 세 시간 동안 장광설을 펼친다. 바이든이 이미 파악해 둔 유럽 내 소련 탱크 숫자를 그가 한참 낮춰 우기자 터져나온 바이든의 한마디. “총리님 우리 동네 식으로 얘기해 볼까요. 헛소리 작작하쇼(Don’t bullshit a bullshitter)!” 동료 의원이 나중에 “뭐라 통역했느냐”고 묻자 통역관의 답은 “농담 마세요(Don’t kid a kidder)….”(『조 바이든, 지켜야 할 약속』) 바이든이 1993년 ‘발칸의 학살자’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에 대한 공습과 보스니아 무기금수 해제를 촉구한다. 확전을 주저하던 클린턴 대통령을 ‘칵테일 좌파’로 의심한 그가 몰아붙인다. “당신은 사실과 정보 파악에만 익숙해져 자신의 본능을 믿지 않는 로즈 장학생 병을 앓고 있다”며 “이번에는 자신의 본능을 믿어야 할 때”라고. 어떤 사실, 데이터보다 처참한 인권 현장을 우선시했던 바이든류의 본능이다. 밀로셰비치 면전에서 “이 빌어먹을 전범(a damn war criminal)”이라고 한 이는? 역시 바이든이다.

자신의 외교 철학을 그는 자서전에 이렇게 요약했다. “비극은 권력을 목적으로 편견을 이용한 매우 똑똑한 사람들에게서 비롯됐다. 나는 미국을 등에 업고 말할 때 겸손은 솔직함 만큼 중요하지 않다(modesty is not as important as candor)는 걸 경험을 통해 배웠다. 세계 지도자들은 나약한 태도의 냄새를 잘 맡았다. 솔직히 말하고 미국의 힘을 드러내는 게 오히려 그들의 신뢰를 얻는 길”이라고. “김정은은 불량배(thug)” “시진핑은 체질적으로 민주주의적인 구석이 하나도 없다”는 등 지금까지도 그는 거침이 없다. 밀로셰비치까지 포함해 공산·사회주의 체제나 그 지도자에 대한 이 가톨릭 신자 ‘요셉’의 불신은 신앙적·근원적인 듯하다. 아무리 선의로 포장하고 말 돌려 가며 북한을 감싼들 없어지지 않을 신념인 듯싶다.

다행스러운 대목은 이즈음 큰 틀의 미국 외교에 대한 자성이 시작된 흐름이다. 1991년 소련 붕괴로 유일 초강대국이 된 미국은 30여 년간 자신감 가득찬 자유주의적 패권(liberal hegemony) 정책을 펼쳐 왔다. 인권 무시 독재 지도자는 쫓아내고,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대체하는 과감한 체제 변경(regime change) 전략이었다. 민주주의 나라끼린 전쟁을 않는다는 이론도 작용했다.

존 미어샤이어 시카고대 교수는 그러나 “1989년 이래 미국은 매 3년 중 2년 전쟁을 치러 왔고, 이라크·아프간 등 7개의 전쟁에 빠져들었다”며 “자유주의 패권 외교는 전 세계에서 민족주의와 현실주의의 거센 도전에 부닥쳐 더 나쁜 상황만 초래했다”고 미국 내 성찰을 주도하고 있다. (『미국 외교의 거대한 환상』) ‘대통령 바이든’ 역시 과거를 리뷰해 보다 실용적 외교를 꾀하려는 쪽이다. 소련을 꽁꽁 봉쇄하는 대신 중국과는 반도체 등 코어테크의 경쟁, 압박을 예고하면서도 기후변화·팬데믹 등 인류 보편 가치의 협력은 병행하려 한다. 망가진 자유민주주의 가치 동맹의 복원 역시 트럼프 반추의 결과였다. 실패한 트럼프의 비건 대북특별대표까지 경청하며 리뷰했던 바이든의 대북 정책은 “클린턴·부시·오바마·트럼프와는 다를 것”이며 “트럼프의 대타협(grand bargain)도, 오바마의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도 아닌 비핵화 단계별로 상응 조치하는 점진적 진전(incremental progress)”(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이다. “잘 조정된 실용적 접근이니 북한이 외교의 기회를 잡아라”(블링컨 국무장관)라고….

문 대통령의 워싱턴 성공법이란 단순해진다. “한국은 인권과 평화를 추구하는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임을 선명히 하는 일이다. 그것도 사회주의 체제와의 지정학적 최전선 보루임을…. 이 공감대 아래 ▶한·미 동맹의 가치 재확인 ▶대화·외교를 통한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공조 ▶역내 안보에 필수적인 일본과의 관계개선 노력 등이 공유되길 기대해 본다. 무엇보다 특정 진영만의 지도자가 아닌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국민 다수의 바람을 바이든에게 전달해 주길 바란다. 외교는 권력 엘리트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최훈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