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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구자정의 이코노믹스

공짜로 집 줬던 소련의 실패, 공공주택의 필연적 결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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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공공주택은 왜 실패하는가

구자정 대전대 역사문화학 교수

구자정 대전대 역사문화학 교수

요즘 부동산 정책을 보면 안타까움이 앞선다. 왜냐하면 사실상 실패가 예정된 정책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부동산 정책은 주택공급을 최대한 공공의 영역에 맡기는 정책으로 요약될 수 있다. 소유보다는 임대를, 시장보다는 공공의 영역에서 부동산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이러한 접근은 사실 역사적으로 볼 때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미 수많은 선례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옛 소비에트 연방의 부동산 정책이 대표적 사례다. 사적 소유가 금지된 소련에서 부동산은 국가가 공급하고 분배하는 대표적인 공공재였다. 그렇다면 소련에서 부동산, 특히 주택시장은 정말 공정하고 평등하며 정의로웠을까?

이윤추구 막고 주택 무상 공급 #‘소련판 LH’ 고질적 부패 양산 #공공기관의 공무원 갑질 판쳐 #정부 개입하면 불평등 더 키워

그 답은 단연코 노(NO)에 가깝다. 외견상 소련의 부동산 정책은 유토피아처럼 보인다. 사적 소유 금지로 부동산을 통한 이윤 추구 자체가 원천봉쇄됐고 주택 또한 사실상 무료로 공급됐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상과 현실은 매우 달랐다. 이 시절을 경험한 러시아인들의 한결같은 기억은 ‘만성적인 부족’과 ‘고질화된 부패’ 이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인민의 생활 수준 향상에 역점을 둔 소련 정부가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인 분야는 주택문제였고, 체제의 특성상 모든 주택은 공공주택이었다. 특히 흐루시초프와 브레즈네프 시절 대량으로 공급된 ‘흐루시초프카’와 ‘브레즈네프카’가 이러한 공공주택의 대표 사례다.

조악한 품질과 보수비용 각오해야

구자정의 이코노믹스 그래픽=신용호

구자정의 이코노믹스 그래픽=신용호

우선 조악한 품질과 내구성이 문제였다. 아파트 건설을 위해 수립된 다수의 소련판 ‘LH’들이 민간건설회사가 하듯 거주자의 편익을 고려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같은 디자인과 자재로 천편일률적으로 지어진 이 주택들은 결국 좁은 주거공간, 승강기의 부재, 부족한 공유시설, 높은 보수비용 등의 문제에 시달렸다. 문제가 특히 심각했던 것은 속도전으로 대량 건설된 ‘흐루시초프카’였다. 공공주택 건설이 인민의 주거난 해결과 생활 수준 향상에 어느 정도 역할을 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수십 가구가 부엌과 화장실을 공유하는 공동아파트 ‘코뮤날카’에 살던 스탈린 시대와 비교할 때, 최소 집으로서의 구색을 갖춘 이런 공공주택은 분명 장족의 발전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공적 공급은 소련의 만성적인 주택 부족 현상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 수요와 공급 간 불일치라는 공공 계획경제의 근본적 한계가 바로 그 원인이었다.

소련의 공공주택에 만연했던 부패가 등장한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소련은 당 소속이든, 정부 소속이든 재화의 분배권을 쥔 공공기관의 ‘공무원(러시아어로 노멘클라투라·Nomenklatura)’이 항상 갑질을 하는 사회였다. 이 갑질이 바로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다. 재화의 분배가 철저히 ‘공공’을 통해 이뤄지던 사회에서 주택을 빨리 얻거나 더 좋은 입지의 주택을 얻는 방법은 그 재화의 분배권을 쥔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는 것 외에는 없었다. 아니면 그 공무원의 가족, 친인척이든가. 또는 해당인과 친해지거나.

그 시절 소련에는 중국의 관시(關系)와 유사한 ‘블라트(Blat)’가 있었다. 공무원 ‘갑’과의 비공식 인간관계는 그 ‘갑’이 당 소속이든, 정부 산하 공기업 소속이든 당장 살림집을 구해야 하는 신혼부부 ‘을’과 더 큰 집이 필요한 기혼 부부 ‘병’에게는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사회적 자산이었다. 웃돈을 주거나 공무원과의 친분을 쌓는 것이 일부가 아니라, 사회구성원 전원이 가담하는 비공식적 관행이 된 순간, 부정부패는 척결해야 할 적폐가 아니라 적응해야 할 시스템 그 자체가 되었다.

유학 시절 필자의 스승은 소련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냉전기 미국으로 망명을 선택한 유대계 러시아인이었다. 스승이 시종일관 회고하는 브레즈네프 시대 소련이 부정부패로 만연한 사회였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공공성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던 소련의 주택정책은 이처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부패와 불평등을 제도화시키며 새롭고 더 큰 문제를 더해 버렸다. 훗날 소련 해체로 이어지게 될 체제의 위기는 이미 주택문제에서도 그 징후가 나타나고 있었다.

공급권 독점하면 부패 불가피해져

대책 거듭할수록 치솟은 서울 아파트 가격

대책 거듭할수록 치솟은 서울 아파트 가격

요즘 LH(한국토지주택공사) 사태가 화두다. 수많은 당 소속, 정부 소속 ‘LH’와 공무원들이 존재했던 소련의 경험에서 알 수 있는 것은, LH와 같은 공공기관 기반 공공주택 정책은 항상 부패에 취약하다는 교훈이다. 스탈린 시대 소련에서 테러와 숙청이 횡행했던 것 역시 재화의 통제권과 공급권을 독점하는 경우 필연적으로 부패할 수밖에 없는 공공기관의 속성에 따른 것이었다. 시장이 부재한 공공 기반 사회주의 경제에서는 폭력과 강제력의 행사 없이 그런 기관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공무원들이 공공선을 추구하도록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비유하면 스탈린 시대 공공기관 종사자들은 부동산 투기를 할 수 없었다. 바로 총살됐기 때문이다. 물론 테러와 숙청은 결코 지속 가능한 방법이 될 수 없었다. 이런 강제력 행사가 사라진 스탈린 사후 소련의 공공기관이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고 부패가 ‘시스쩨마(체제)’의 일부가 된 것은, 공공선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던 사회주의적 공공 지향 경제의 필연적 말로였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LH 사태에서 목격되는 현실은 공공기관 근무자의 개인적 자질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을 필연적으로 정보 취득과 권한 행사에서 ‘갑’의 위치로 만드는 공기업의 속성 그 자체가 문제가 된다. 사실 걱정스러운 것은 LH 사태가 아니다. 여전히 “공적 공급을 통한 주택문제 해결”이라는 실현 불가능한 발상을 버리지 못하고 공공 공급의 영역에서 해결책을 찾으려는 정책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옛 소련의 경험이 보여주는 것은 ‘게임의 심판’이 자신의 역할을 넘어 ‘게임의 당사자’가 되면 항상 만성적인 부족과 고질화된 부패라는 결과만이 초래됐다는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모두가 평등한 유토피아를 만들려는 시도는 항상 부패와 더 큰 불평등으로 점철된 디스토피아가 됐다. 유토피아의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고로 유토피아를 만들겠다는 정책은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는 곳에 가겠다는 몽상과 다름없다. 25번의 부동산 대책에도 불구하고 주택 가격이 폭등하고 공공기관에 부패가 구조화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소련판 관시 ‘블라트’ 있어야 주택 배정 빨라

소련판 관시인 블라트는 시장을 대신해 재화의 분배를 결정하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다. 전성기이자 안정기인 브레즈네프 시대조차도 재화의 부족이 만성화된 소련에서 블라트는 공공주택 문제에서만 존재한 현상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소련에서는 모든 것이 ‘공공재’였기 때문이다. 블라트는 생필품 구매에서 국영 탁아소 배정, 취직, 대학 입시, 소련 공산당 입당에 이르기까지 사회·정치·경제·문화의 모든 분야를 망라한 영역에 스며든 하나의 시스템이었다.

블라트의 문제점이 가장 심각했던 영역은 경제 분야였다. 바로 시장의 부재와 공공기반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근본적 한계 때문이다. 블라트가 작용한 재화는 주택만이 아니라 비누·치약과 같은 생필품에서 발레 공연의 특석 입장권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물품을 포괄했다. 소련 인민들은 어떤 물건이 절실히 필요할 때 그 물품의 가격이 얼마인지가 아니라, 그 물건의 분배권을 쥔 사람이 누구인지를 먼저 찾았다. 중요한 것은 그 재화의 액면가가 아니라, 그 재화의 통제권을 가진 공기업은 어디며, 분배를 담당한 공무원이 누구인가였기 때문이다. 인허가권을 쥔 당원 또는 공무원과 분배권을 쥔 공기업 종사자가 서로의 특권을 거래하는 일종의 시장은 소련에서 흔한 풍경이었다. 예컨대 소련의 국민차인 ‘쥐굴리’ 승용차 출고를 담당한 공무원과 ‘브레즈네프카’ 아파트 입주를 담당한 공무원은 빠른 차량 출고와 빠른 주택 입주를 거래할 수 있었다.

이처럼 소련의 사회주의 경제를 지배하던 것은 자본주의 경제에 친숙한 수요와 공급 곡선이 아니라, ‘수요와 블라트’ 곡선이었다. 비공식적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소련의 블라트 기반 경제는 확실히 ‘사람이 먼저’인 세계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세계는 결코 정의롭지도 공정하지도 평등하지도 않았다.

◆구자정

대전대 역사문화학 교수. 연세대와 미 UC버클리대에서 러시아사를 공부했다. 역사학회, 한국 슬라브·유라시아 학회, 한국 러시아사학회에서 운영위원 및 편집·연구이사를 거쳤다.

구자정 대전대 역사문화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