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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휴식 필요한 나에게 가끔 ‘10분 멍’ 선물을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홍미옥의 모바일 그림 세상(74)

적어도 진한 오렌지 주스를 줄줄 흘리며 놀란다거나 조금 심하면 포기김치로 따귀 정도는 때려야 했다. 채널 고정을 위해서라면 말이다. 위의 예는 가히 막장의 전설(?)로 회자하는 드라마의 장면으로 수많은 패러디를 양산할 정도였다.

이처럼 그동안 내가 알던 인기 드라마나 예능은 듣도 보도 못한 상류층의 막장 스토리라거나 아니면 출생의 비밀이 몇 번씩이나 등장하곤 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시청률이라는 무시무시한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라면! 예능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울리거나 곤경에 빠뜨리면 상대방은 웃고 시청자는 즐거웠다. 굳이 볼륨을 높이지 않아도 시간이 흐를수록 화면 속 인물들의 목소리는 커져만 갔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10분이 순삭

최근 일상의 모습을 가감 없이 콘텐츠로 인기를 끌고 있는 10분 멍 시리즈 중 서울역의 어느 하루. 아이패드7, 프로크리에이트. [그림 홍미옥]

최근 일상의 모습을 가감 없이 콘텐츠로 인기를 끌고 있는 10분 멍 시리즈 중 서울역의 어느 하루. 아이패드7, 프로크리에이트. [그림 홍미옥]

그런데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건 뭐란 말인가. 방송 내내 하염없이 물이 흐른다거나 부지런히 제 갈 길을 오가는 사람들만 보여준다. 또 아무 말 없이 나무를 파고 숟가락을 만든다. 화면에는 오직 나무가 파이는 것만 보여준다. 정말 특별할 게 하나도 없는 장면이다.

여기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한 번쯤은 가봤을 서울역이다. 발길을 재촉하는 사람, 하염없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 그리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사람이 있다. 별다른 혹은 특이한 설정도 사람도 없다. 그저 조금 전에도 그랬듯이 걷고 말하고 서두르고…. 그뿐이었다. 자연스레 바람 소리, 버스가 지나는 소리 등 일상의 소음은 배경음악이 돼 있었다.

그리고 그걸 10여 분간이나 보고 있는 내가 있다. 이상한 건 10여 분이 금방 지나가 버린 것이다. 게다가 재밌기까지 하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아! 요즘 유행한다는 멍 때리기가 이런 걸까? 마침 프로그램의 제목도 ‘가만히, 10분 멍’이다. EBS 방송에서 제작한 심심하면서도 요상하고 재밌는 프로그램이다.

가끔은 멍! 창조의 순간인가?

국립해양박물관의 '지구의 날' 맞이 행사 포스터. [사진 국립해양박물관]

국립해양박물관의 '지구의 날' 맞이 행사 포스터. [사진 국립해양박물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역사의 순간에 뉴턴과 아르키메데스가 있다. 사과나무 아래서 잠시 ‘멍 타임’을 즐기던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알아냈고 욕조에서 느긋한 ‘멍 휴식’을 갖던 아르키메데스는 유레카를 외치며 나왔다. 물론 거듭되는 연구와 노력의 산물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모든 대단한 결과에는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 필요함은 인지상정이다. 그게 나무 그늘이건 욕조 안이건 혹은 마룻바닥 위에서건 도처 어디서나 말이다.

몇 년 전부터 개최되고 있는 ‘멍 때리기 대회’가 올해는 지구의 날을 맞이해 ‘海멍海몽’이라는 주제로 부산에서 열렸다. 코로나로 답답한 일상을 보낸 지 일 년이 훌쩍 넘은 터라 그런지 많은 이들이 참가해 성황을 이뤘다. 이제는 국내뿐만이 아니라 온라인으로 글로벌 멍 때리기 대회가 개최되고 있다. 해를 거듭할수록 참가자도 늘어나고 호응도도 높아진다고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우리의 뇌가 활성화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는 걸 보면 ‘쉼’이란 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할 것도 없음이다.

가끔은 내가 나를 쉬게 해주자

남들처럼 열심히 살지 않아도, 하는 일이 없어도 힘든 게 인생이고 또 우리들이다. 내가 나를 잠시 쉬게 해주는 것, 크나큰 선심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나의 마음 한 조각이면 될 터이다. 10분짜리 프로그램을 보고도 몇 시간을 쉰 듯한 느낌이 든 걸 보니 그동안 나도 꽤 지쳐 있었나 보다. 일부러 날짜를 잡고 숙소를 예약하고 경비를 계산하며 떠나는 휴가는 이미 지친 상태로 시작하기 마련이다.

휴식이 필요한 나의 몸과 마음에 가끔은 ‘멍!’이라는 선물을 주는 것도 좋겠다. 아무 생각 없이 내가 나를 놓아주는 거, 복잡한 준비물도 필요 없다. 그냥 10분이면 충분하다.

스마트폰 그림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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