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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20분 원고 손질해줬더니 망고 한 상자 보내온 선배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92)

나는 초보 작가다. 25년간 회사에 다니다가 명예퇴직한 지 6년째, 정기적으로 의무감을 가지고 하는 일은 글쓰기뿐이다. 2018년부터 중앙일보 ‘더 오래’에 연재를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나 자신을 작가로 소개했고 남들에게도 작가로 불렸다.

수입은 적다. 1282만5679원. 지난 2년 반 동안 번 돈이다. 이 말을 들으면 직장 동료들은 “그러기에 왜 나가서 고생하냐?”며 혀를 찰지도 모른다. 코로나 때문에 이 정도에 머물렀다고 핑계를 대 보지만 코로나가 아니었어도 별 차이 없을 것 같다.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번 돈이라 그런지 특별히 느껴져 함부로 쓰지 않고 통장에 고스란히 모아두었다가 얼마 전에 나무를 심는 기분으로 전망 있어 보이는 작은 회사의 주식에 투자했다.

주 수입원은 글을 보내고 원고료를 받는 일인데 요즘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납품을 못 해도 기계를 돌리는 공장처럼, 달라는 곳은 없어도 글은 늘 쓰니 노트북과 블로그에는 재고가 쌓여간다. 또 매년 해오던 ‘해외 한 달 살기’ 경험을 이야기하고 강연료를 받았는데 그것 역시 코로나 19로 인해 끊어졌다. 출판할 원고를 보완해주고 목돈을 만지기도 했다. 그 밖에도 문장과 관련한 일은 다 받아서 한다.

시간과 노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인데도 아직 글은 돈 주고 사야 하는 상품이라는 인식이 희박하다. 유명작가가 아닌 아래 단계에서 노력 분투하고 있는 작가에게는 더욱 그렇다. [사진 unsplash]

시간과 노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인데도 아직 글은 돈 주고 사야 하는 상품이라는 인식이 희박하다. 유명작가가 아닌 아래 단계에서 노력 분투하고 있는 작가에게는 더욱 그렇다. [사진 unsplash]

세상에는 작가, 화가, 연주가처럼 느낌과 재주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생각보다 훨씬 많은데 안정권의 소수를 제외하면 돈 버는 사정은 대부분 비슷할 것 같다. 어제 오후에 회사를 운영하는 선배가 연락해왔다. 홈페이지를 개편하는데 직원들이 써온 회사 소개와 직접 쓴 대표이사 메시지가 좀 부자연스러운 것 같다며 한번 봐달라고 했다.

문장 교정과 대필이야 늘 하는 익숙한 일이다. 회사에 다닐 때는 회사 전체에서 문장과 관련한 온갖 일을 내게 가져오니 아주 피곤했다. 처음에는 내 일은 내 일대로 있는데 그런 가욋일 때문에 야근하는 게 싫었다.

점점 시간이 흐르자, 기껏 열심히 해줬더니 나중에는 나를 ‘글만 쓰는 놈’(‘글도 쓰는 놈’이 아니다)으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어서, 해줄 수 있지만 조금씩 가리고 따져가며 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나를 고깝게 생각한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그러다가 연차가 올라가고,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의 경계가 명확해진 다음부터는 조직에서 뭔가 남다른 재주가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기꺼이 해주었다. 그런데 막상 직급이 올라가자 일도 적어졌다. 대리 시절에는 과장, 차장까지도 미안해하지도 않고 자기 일을 내 앞에 툭툭 던져놓다가 내가 차장, 부장이 되니까 그런 게 없어지고 회사 차원에서 꼭 필요한 것만 ‘공식적’으로 전달돼 그렇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그 선배한테 봐 드릴 테니 원고를 보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원래는 돈을 받고 해주는 건데 간단하니까 그냥 해드릴게요”라고 덧붙였다. 선배가 그 말에 당황했는지 않았는지 모르겠으나, 이제 월급쟁이 아닌 작가의 삶을 살기로 한 나로서는 당연한 입장이고 필요한 태도라 낯간지럽지만 진작부터 주변에 해오던 말이었다. 돈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가치를 평가받지 못하는 작업은 직업이 될 수 없고, 가치를 측정하는 가장 보편적인 수단은 돈이다.

아직 많은 사람이 글 값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다. ‘재주가 있으니 해줄 수 있는(해줘야 하는) 일’로 생각하고, 시간 투자와 정신적 소진은 원가로 인식하지 않는다. 콘텐츠의 유료화는 사회적으로 공론화하고 있지만, 개별 생산자가 정당한 보수를 챙기는 것은 아직 요원한 일이라 나부터 “이건 파는 물건입니다”라고 한마디씩 하기로 한 것이다. 만일 내게 “겨우 그 정도 실력으로 돈을 받냐?”고 한다면 당황하지 않고 “대신 쌉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느 해의 신년사. 회사의 공식적인 글은 경영 전략이 표현되고 전달되는 공식적 도구인데 자기 업무 또는 개인적인 글까지 봐달라거나 써달라고 가지고 오는 경우가 많았고, 그때마다 공과 사를 명확히 구분하기 힘들었다. [사진 박헌정]

어느 해의 신년사. 회사의 공식적인 글은 경영 전략이 표현되고 전달되는 공식적 도구인데 자기 업무 또는 개인적인 글까지 봐달라거나 써달라고 가지고 오는 경우가 많았고, 그때마다 공과 사를 명확히 구분하기 힘들었다. [사진 박헌정]

부탁받은 일은 20분 만에 끝났다. ‘열심히 썼고 내용은 다 들어갔는데 좀 이상하다’며 가져오는 이런 글에는 중요한 정보와 담당자들의 치열한 고민이 충분히 들어가 있으므로 조금만 다듬으면 글이 살아난다.

문장 성분이 따로 놀거나(주어와 서술어 불일치처럼), 한 문장이나 단락에 여러 메시지가 뭉치거나, 토씨와 연결어 사용이 부정확하거나, 부적합한 어휘 사용, 엉뚱한 단락 배치 같은 문제가 보이면 빨간펜으로 몇 글자만 끄적여도 막힌 혈이 뚫린다.

선배는 만족해하며 기꺼이 돈을 내겠다고 했지만, 나는 ‘원칙상 그렇다는 것이지 이런 간단한 일까지 돈을 받을 수는 없다’고 말을 바꿨다. 가끔 동네 병원에 갔다가 돈 안 내고 나오거나 변호사나 세무사에게 전화로 간단히 물어보고 끝나는 일도 있지 않은가.

그러면 뭐라도 보내주겠다고 하는데, 계속 밀고 당기면 실례일 것 같아 주소를 알려드렸다. 며칠 뒤 고급 과일이 도착했다. 돈 대신 현물 수입이 생겼으니(너무 높게 받았다!) 오랫동안 비어있던 수입 장부에 망고 하나당 얼마로 써넣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흐뭇한 기분이 든다. 물론 수입 때문은 아니다. 내 작은 재주를 잊지 않고 연락해 준 것이 기뻐서 그렇다. 은퇴 후 2막의 직업이 갖는 의미를 새삼 느껴보았다.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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