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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엔 ‘화룡점정 시구’ 빛나 상상의 모험 숨 쉰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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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5호 24면

[시로 읽는 세상] 시 귀신 ‘시마’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스무 살 학생들은 벌써 아는 게 많고 똑똑하다. 열심히 배워서 입학하기 때문이다. 그 지식과 관념을 우선 내려놓자고 창작 수업에서 권한다. 그것들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해야 할 것 같아서다. 틀에 박힌 사고는 비슷한 말만 찍어 낸다. 창작은 생각의 반복적인 개진이 아니라 생각의 흔들림과 무너짐을 체험하는 일이다.

함민복 ‘반성’ #강아지가 특별한 존중 대상 돼 #구상 ‘밭 일기’ #힘을 다 뺀 자리서 힘센 말 솟아나 #황지우 ‘서풍 앞에서’ #박해받고 싶은 황홀한 마조히즘 #브레히트 ‘해결 방법’ #고통스러운 풍자로 체제 비판

그 방편 중 하나로 괄호 넣기 같은 걸 해 본다. 이를테면 ‘소는 눈망울이 크다/ 소고기는 맛있다/ (    )?’란 초등생의 시를 들려주고, 네 글자로 괄호를 채우라는 식이다. 학생들의 식상하거나 재치 있는 대답들을 들으며, ‘어떡하지’라는 원문에 적중하길 기다린다. 나중엔 뜻밖의 당혹과 진심의 유출을 담은 이 시가 좋은 시라는 데 함께 닿곤 한다.

어린 시인은 말문이 막힌 곳에서 힘을 다해 시 문장을 찾아냈다. 기실 모든 시인들이 그렇다. 시상이 끊어진 곳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힘껏 버티는 것이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키츠는 요령과 편법으로는 뚫을 수 없는 이 지점에 대해, 사실과 이성에 쉬 의지하지 말고 모호하고 의문스러운 채로 견디라고 했다. 생각이 끝난 곳이 바로 다른 생각의 출발선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옛 시인들은 전심전력의 몰입을 독촉하는 내면의 존재를 ‘시마(詩魔)’라 불렀다. 시 귀신이라는 뜻이다. 사실과 논리를 잊어 가며 귀신에 홀린 채 정신의 낯선 지대를 헤매는 이의 모습은 적이 위태롭다. 고려 시인 이규보의 『구시마문(驅詩魔文)』에는 이 증세가 잘 그려져 있다.

“네가 오고부터 모든 일이 기구하기만 하다. 흐릿하게 잊어버리고 멍청하게 바보가 되며, 주림과 목마름이 몸에 닥치는 줄도 모르고, 추위와 더위가 몸에 파고드는 것도 깨닫지 못하며, 계집종이 게으름을 부려도 꾸중할 줄 모르고…….”

시 쓰기에 골몰하다 보면 정신을 잘 놓쳐 현실 부적응자가 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규보의 시마는 시인의 문명과 지위가 다 제 덕분이라 말한다. 시마는 닦달하는 빚쟁이고, 시인은 닦달당하는 빚쟁이다. 그런데도 시인이 견디는 것은 고생 끝에 손에 쥐는 몇 줄 시 때문일 테다. 시마는 시인을 고생시켜 어떤 말을 들려주는 걸까.

한시 용어를 빌려 좀 단순히 말하자면, 시마는 시인의 작품에 눈=자안(字眼)을 그려 넣어 준다. 화룡점정의 고사 그대로다. 눈 없는 용은 용이 아니듯 자안 없는 시는 시다운 시가 아닐 것이다. 또 다른 고려 시인 강일용은 여러 번 천수사 골짜기를 찾아가 해오라기를 관찰하다가, 이 한 줄을 얻고 기뻐했다 한다.

 비할벽산요(飛割碧山腰)
 날아서 푸른 산의 허리를 가르네

‘가를 할’자가 바로 자안이다. ‘가르네’에는 다른 말이 대신하기 어려운 독특한 광채가 난다. 짙푸른 산색과 새의 흰 빛을 대조시킨 이 한 글자는 사물에 침투하는 지각의 비상한 힘을 느끼게 한다. 한시와 달리 우리 현대시에서 자안은 한두 글자가 아니라 구절과 문장으로 확장될 수 있다. 작은 사례들을 골라 들어 본다. 함민복의 ‘반성’이란 동시다.

 늘
 강아지 만지고
 손을 씻었다

 내일부터는
 손을 씻고
 강아지를 만져야지

자안은 2연에 맺혀 있다. 1연은 사실임에 반해 이 석 줄은 사실로부터의 뭉클한 도약을 보여 준다. 그것은 강아지가 흔한 ‘개’에서 특별한 존중의 대상으로 바뀌는 순간을 품는다. 그런가 하면, 구상의 ‘밭 일기’는 겸허해서 숙연하다.

 밭에서 싹이 난다.
 밭에서 잎이 돋는다.
 밭에서 꽃이 핀다.
 밭에서 열매가 맺는다.

 밭에서 우리는
 (        )만 한다.

괄호에 ‘심부름’이 들어가면 결구에 시의 불이 켜진다. 농사가 자연=하느님의 소관이라는 쉽고도 깊은 깨달음이 여기에 빛난다. 주도하는 ‘우리’는 알고 보니 거드는 자에 불과했다. 이처럼 힘을 다 뺀 자리에 힘센 말이 솟아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자안에는 피가 배어난다. 황지우의 ‘서풍 앞에서’다.

마른 몸으로 제 몸과 마음에 바람을 들이는 저 은사시나무는 박해받는 순교자 같다. 그러나 다시 보면 저 은사시나무는 박해받고 싶어 하는 순교자 같다.

자안은 두 번째 문장에, 정확히는 ‘박해받고 싶어 하는’이라는 이상한 구절에 들어 있다. 정치적 박해의 시대에 시인은 어떻게 싸웠나. 고난을 자청해 싸웠다. ‘박해받고 싶어 하는’의 뜨거운 마조히즘에는 의식의 자발적 고양과 실존적 결단의 ‘비극적 황홀’이 들어 있다.

 6월 17일 인민 봉기가 일어난 뒤
 작가연맹 서기장은 스탈린 가에서
 전단을 나누어주도록 했다.
 그 전단에는, 인민들이 어리석게도
 정부의 신뢰를 잃어버렸으니
 이것은 오직 두 배의 노동을 통해서만
 되찾을 수 있다고 씌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정부가 인민을 해산해버리고
 다른 인민을 선출하는 것이
 더욱 간단하지 않을까?

브레히트는 ‘해결 방법’이라는 위의 시에서, 1953년의 동독 봉기와 탄압을 다루었다. 말미의 세 행 반이 눈이다. ‘인민 해산’과 ‘다른 인민 선출’이란 말은 고통스러운 풍자다. 무력 진압의 부당성과 체제의 야만에 대해 이보다 더 신랄한 비판이 있을까. 이 시는 자꾸 우리 현실에 겹쳐진다. 차선도 차악도 잘 안 보이던 지난달의 선거판은, 정치의 실종으로 인한 실질적 인민 해산의 풍경 아니었을까.

브레히트라면, 선거를 보이콧하자는 시를 썼을 것 같다. 시민의 자발적·주체적 의지에 의한 선거의 분쇄, 즉 인민에 의한 다른 인민의 선출……. 물론, 상상이지만 그는 상상하며, 아팠을 것이다. 쉬운 시와 어려운 시, 실험시와 정치시에 이르기까지, 좋은 시에는 자안이 빛나고 시마의 그림자가 너울거린다. 거기엔 늘 상식을 벗어난 도약, 통념을 거스른 상상의 모험이 숨 쉰다.

이영광 시인·고려대 교수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에서 서정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8년 계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서정성과 불온함이 공존하는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시집 『끝없는 사람』 『깨끗하게 더러워지지 않는다』 등을 냈다. 고려대 미디어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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