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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그림 지극히 아낀 이건희…행방묘연 '흰소'도 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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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섭 , 흰소 , 1953~54, 30.7x41.6cm.[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중섭 , 흰소 , 1953~54, 30.7x41.6cm.[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중섭 , 황소 , 1950 년대 , 26.4x38.7cm.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중섭 , 황소 , 1950 년대 , 26.4x38.7cm.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중섭, 바닷가의 추억_피난민과 첫눈, 1950년대, 32.3x49.5cm.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중섭, 바닷가의 추억_피난민과 첫눈, 1950년대, 32.3x49.5cm.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붉은 바탕에 금방이라도 우렁찬 울부짖음이 들릴듯한 그림 '황소'. 이중섭이 1954년 통영에 머무르던 시절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화면 전체에 생명력이 넘쳐보인다. 실제로 이중섭은 한국전쟁이 끝난 시기, 그림만 열심히 그려 팔면 일본에 있는 가족을 만날 것이라는 ‘희망’에 가득 차 있던 시기에 이 그림을 그렸다. 이 '황소' 그림은 지난달 28일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 중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다.

국립현대미술관 기증품 보니... #이중섭 작품만 총 104점 포함 #청전 '무릉도원도' 100년만에 공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국민작가 이중섭(1916~1956).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이중섭 사랑도 남달랐다. 이번에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작품 중 이중섭 작품만 총 104점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됐다. 회화 19점을 포함해 엽서화 43점, 은지화 27점 등이다. 이건희 컬렉션 중 일부가 제주도에 있는 이중섭미술관에 12점이 기증된 것까지 고려하면 실제로 이건희 회장이 소장하고 있는 이중섭 작품은 그 규모가 훨씬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중섭 작품만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특별전을 열 것"이라고 밝혔다.

국립현대미술관은 7일 오전 이건희 회장의 기증미술품 1488점(1226건)의 세부를 공개했다. 이번 기증작 중엔 김환기, 나혜석, 박수근, 이인성, 이중섭, 천경자 등 한국 근현대미술 대표작가의 명작들이 줄줄이 들어있다.

김광균 시인 거쳐 이건희 회장 품으로 

이건희 회장의 붉은 '황소'는 1955년 1월 이중섭 개인전에 출품됐다가 '와사등'의 시인 김광균(1914~1993)이 샀던 작품인데, 이건희 소장을 거쳐 이번에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기증된 것이다. 이중섭이 1953~54년에 그린 '흰소' 그림도 함께 기증됐다. 붉은 '황소'와 달리 '흰소'는 힘겹게 앞을 향해 나아가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처절해 보인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소는 일제강점기부터 조선인을 상징하는 동물이었고, 특히 흰색은 조선인의 색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흰소’가 가지는 상징성이 매우 크다"면서 "이번에 기증된 '흰소'는 자조적인 느낌이 강한 것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최열 미술평론가는 "이번에 기증된 '황소'는 홍익대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작품과 더불어 이중섭 작품의 최고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그림"이라며 "그동안 국립현대미술관에 이중섭의 '걸작'이라 할 작품이 없었다. 이제야 비로소 그 빈 틈이 메워지게 됐다"고 말했다.

한편 윤 관장은 "이중섭은 자신의 자신의 정체성을 종종 ‘소’에 빗대어 표현하곤 했다. 일제강점기 일본 유학시절부터 소를 자주 그렸고, 해방 후에는 특히 여러 점의 소 그림을 남겼다"면서 "이번에 기증된 '흰소'는 현존하는 것으로 알려진 약 5점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이 작품은 1972년 개인전과 1975년 출판물에 등장했다가 행방이 묘연했다가 이번 기회에 세상에 알려졌다.

나혜석 작품 등 희귀 작품 수두룩  

나혜석, 화녕전작약(華寧殿芍藥),, 1930년대, 33x23.5cm.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나혜석, 화녕전작약(華寧殿芍藥),, 1930년대, 33x23.5cm.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백남순 , 낙원 , 1937, 166x367cm.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백남순 , 낙원 , 1937, 166x367cm.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김종태 , 사내아이, 1929, 53x45.4cm.[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김종태 , 사내아이, 1929, 53x45.4cm.[사진 국립현대미술관]

한국 최초의 신여성 화가 나혜석(1896~1948)의 대표작 '화녕전작약'도 이번에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화녕전작약'은 나혜석이 1930년대 수원 고향집 근처에 있는 화녕전 앞에 핀 작약을 소재로 그린 그림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이 그림은 남편 김우영과의 이혼 후 1934년 '이혼고백서'를 발표해 엄청난 사회적 스캔들을 일으킨 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빠른 속도감으로 날아갈 듯한 필체와 강렬한 색채 표현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나혜석은 일제강점기 1세대 유화가이자 첫 여성 서양화가이며 문학인으로. 도쿄여자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일찍이 유럽여행을 하고, 이혼하는 등 파란만장한 생애 동안 많은 작품을 남겼다. 문제는 나혜석 작품 대부분 소실됐으며, 현존하는 작품 중 진위가 확실한 작품은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화녕전작약'은 나혜석의 진작으로 확실해 진위평가의 기준이 되는 작품으로 꼽힌다. 최열 미술평론가는 "나혜석 작품은 지금까지 전해지는 작품이 매우 적고, 현재 전해진 작품 중 상당수가 진위 논란에 휩싸여 있다"며 "그중 '화녕전작약'은 손에 꼽히는 진품으로 평가받는다"고 말했다.

또 다른 희귀작은 여성 화가이자 이중섭의 스승이기도 했던 백남순(1904~1994)의 유일한 1930년대 작품 '낙원'(1937)이다. 백남순은 나혜석과 마찬가지로 도쿄여자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1세대 서양화가다. 1920년대에 파리 유학을 가서 미국 유학 출신의 임용련을 만나 결혼한 후 1930년에 귀국했다. 이들이 함께 부부양화전을 개최한 것이 당시 엄청난 사회적 이슈였다.

윤 관장은 " '낙원'은 한국의 무릉도원 전통과 서양의 아르카디아 전통이 묘하게 결합된 독창적인 작품으로, 1930년대 백남순 작품으로는 유일하게 전해지는 만큼 그 역사적 의미가 각별하다"고 강조했다. 임용련과 백남순은 함께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고보에서 영어 및 미술 교사로 재직했고, 그곳에서 이중섭, 문학수 등 다음 세대 서양화가들을 가르쳤다. 현존하는 사진 자료엔 오산고보 미술반에 백남순의 '낙원'이 펼쳐져 있다.

기증작 중 근대 작품이 58%

기증작 총 1488점은 한국 근현대미술 작가 238명의 작품 1369점, 외국 근대작가 8명의 작품 119점으로 구성됐다. 이중 회화가 412점, 판화 371점, 한국화 296점, 드로잉 161점, 공예 136점, 조각 104점으로, 비교적 모든 장르를 고르게 포함돼 있다.

제작연대별로는 1950년대까지 제작된 작품이 320여점으로 전체 기증품의 약 22%를 차지한다. 그러나 작가의 출생연도를 기준으로 할 때 1930년 이전에 출생한 이른바 ‘근대작가’의 범주에 들어가는 작가 작품 수는 약 860점에 이르러, 전체 기증품의 약 58%를 차지한다. 작가별 작품 수를 보면, 유영국 187점(회화 20점, 판화 167점)으로 가장 많고, 이중섭의 작품이 104점(회화 19점, 엽서화 43점, 은지화 27점 포함), 유강열 68점, 장욱진 60점, 이응노 56점, 박수근 33점, 변관식 25점, 권진규 24점 순이다.

청전의 '무릉도원도' 100년 만에 세상으로 

이상범 ,무릉도원도, 1922, 158.6x390cm.[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상범 ,무릉도원도, 1922, 158.6x390cm.[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김은호, 이상범, 변관식, 김기창, 박래현 등 한국화가의 ‘대표작’도 대거 기증됐다. 이상범이 25세에 그린 청록산수화 '무릉도원도'(1922), 노수현의 대표작으로 유명한 '계산정취'(1957), 김은호의 초기 채색화 정수를 보여주는 '간성(看星)'(1927), 김기창의 5미터 대작 '군마도'(1955) 등이다.

이중 청전 이상범(1897~1972)의 이상범의 '무릉도원도'(158.6x390cm)가 100년만에 세상 밖으로 나왔다. 이상범이 불과 25세에 후원자 이상필 요청으로 제작한 그림으로 존재만 알려졌을 뿐, 실물을 본 사람은 거의 없었던 작품으로 꼽힌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스승인 심전 안중식(1861~1919) '도원문진도' 전통을 잇는다고 할 만한 과감하고 아름다운 색채와 구성이 특징"며 "존재만이 알려진 작품이었는데 '이건희 컬렉션' 중 하나로 이번에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됐다"고 밝혔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국립현대미술관에 총 1000점 이상의 작품이 대량으로 기증되면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1만점 시대를 맞이했다"고 말했다. 이어 "모든 기증 작품은 항온·항습 시설이 완비된 과천관 수장고에 안전하게 입고됐다"며 "기증 작품은 작품검수, 상태조사, 등록, 촬영, 저작권협의 및 조사연구 등을 통해 순차적으로 미술관 홈페이지에 공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립현대미술관은 2021년 8월 서울관을 시작으로, 2022년에는 과천, 청주 등에서 특별 전시 등을 통해 작품을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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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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