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 박물관 등에 기증되는 '이건희 컬렉션'. 연합뉴스
전국 자치단체들이 ‘이건희 미술관’ 유치전에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이건희 회장 유족 측이 지난달 28일 ‘이 회장 소유의 고미술품과 세계적 서양화 작품, 국내 유명 작가의 근대미술 작품 등 총 2만3000여점의 미술품을 기증하겠다’고 밝힌 것이 계기다. 곧바로 문재인 대통령이 이 회장의 기증 정신을 살리고 좋은 작품을 국민이 감상할 수 있도록 이른바 ‘이건희 미술관’ 건립을 지시하면서 자치단체마다 앞다퉈 유치경쟁에 나섰다.
지자체들, 너도나도 미술관 유치전 #부산 “수도권 문화 편중 해소해야” #광주 “비엔날레, 예향의 도시 적격” #대구 “이 회장 고향이자 삼성 창업” #창원·의령·세종·수원도 유치 추진
이건희 미술관 건립에 대한 입장을 처음 밝힌 건 미술계다. 미술가·평론가·미술사가 등 미술인 100여명은 지난달 30일 오전 성명을 내고 “삼성가에서 국가에 기증한 근대미술품과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근대미술품 등 각 기관에 흩어져 있는 근대미술품을 한곳에 모아 국립 근대미술관을 건립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이들은 “문화예술계는 지난 20여년 전부터 근대미술이 현대미술관에 더부살이하는 기형적인 상황이 이어져 왔는데 이번 기회에 국립 근대미술관 건립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립근대미술관은 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근대미술작품 2000여 점과 이번 삼성가 기증 근대미술품 1000여 점 등을 기반으로 설립하고 그 안에 ‘이병철실’, ‘이건희실’과 상설·기획전시실을 두어 금번 삼성가의 기증 뜻을 기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들이 꼽는 미술관 장소는 서울 송현동 문화공원 부지와 세종시로 이전한 행정부가 자리했던 정부서울청사 등이다.
반면 부산시와 광주광역시 등은 미술관이 지역으로 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박형준 부산시장은 지난 2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이건희 미술관, 부산에 오면 빛나는 명소가 됩니다’란 글을 올려 미술관 유치 의사를 밝혔다.
박 시장은 이 글에서 “안 그래도 서울 공화국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상황이고, 문화의 서울 집중도 극심한 현실에서 미술관은 대한민국의 문화 발전을 위한 고인의 유지를 살리려면 수도권이 아닌 남부권에 짓는 것이 온당하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부산은 국제관광 도시로 지정돼 있고 북항에 세계적인 미술관 유치 계획도 있다”며 “유족 의견을 중시해 장소성, 건축, 전시 등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미술관을 만들겠다”고 덧붙였다.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수집한 미술품 2만3000여점이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 등에 기증된다. 사진은 지난달 29일 서울 용산구 삼성 리움미술관. 뉴스1
김승남 더불어민주당(전남 고흥·보성·장흥·강진) 의원은 지난달 30일 “이건희 미술관을 광주광역시에 건립하자”고 제안했다. 김 의원은 “광주는 광주비엔날레, 광주국립박물관, 광주시립박물관 등 예향의 고장으로 불릴 만큼 문화 기반시설을 갖춰 이건희 미술관과 연계하기 쉽다”며 “광주는 광주학생운동과 5·18민주화운동의 중심지로 이 전 회장이 생전 강조했던 공존의 정신을 펼치기에도 적합하다”고 밝혔다. 광주시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문화 중심도시’를 표방하고 있어 이건희 미술관 유치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분위기다.
삼성전자의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 회장이 출생한 경남 의령군도 미술관 유치를 희망하고 있다. 오태완 의령군수는 지난 3일 “기증의 의미를 잘 살려 많은 국민이 좋은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미술관을 이 회장의 선대 고향인 의령에 유치하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할 계획”이라며 “삼성과 뿌리 깊은 인연이 있는 의령에 ‘미술관을 유치한다면 그 의미가 더욱 깊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본사와 이 회장의 묘소가 있는 수원시도 삼성과의 인연을 앞세워 미술관 유치 움직임이 일고 있다. 김승원 더불어민주당(수원갑) 의원은 최근 수원시에 “이건희 미술관 유치에 나서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수원시도 지난 4일 염태영 시장 주재로 정례 현안회의를 열고 이건희 미술관 유치에 대한 검토 작업을 했다.
이건희 회장이 출생한 대구를 비롯해 창원시와 세종시 등도 미술관 유치를 희망하고 있다. 이들 지자체들은 이건희 미술관 유치가 가져올 문화·경제적 손익을 저울질하며 경쟁적으로 유치전에 뛰어들 태세다. 대구는 삼성의 창업지이자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의 연고지다. 대구시는 6일 "이건희 미술관 건립을 위한 실무협의회를 꾸려 7일 회의를 연다"고 밝혔다.
이춘희 세종시장은 지난 3일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만나 유치 의사를 건의했다. 이 시장은 6일 기자 간담회에서 "세종시에 만들어질 국립박물관 단지에 이건희 미술관이 만들어졌으면 한다”라며 “이건희 회장 소장품 중 세종지역 출신인 장욱진 화백 작품도 있다”고 덧붙였다. 최민호 국민의힘 세종시갑 당협 위원장도 이날 보도자료를 내고 “세종시는 미국의 워싱턴 D.C처럼 한국의 행정 수도란 상징성이 있다”고 했다.
앞서 허성무 창원시장은 지난 3일 김경수 경남지사 등이 참석한 경남 현안간담회에서 “이건희 미술관 건립에 관해 관심이 높은데 마산해양신도시에 이미 부지가 확보된 국립현대미술관 창원관 건립과 연계해 짓는 것이 추진 속도가 빠를 것”이라며 사실상 유치 의사를 밝혔다.

'이건희 컬렉션' 기증... 장욱진 '소녀/나룻배'. 연합뉴스
지자체들은 이건희 미술관이 각 지역의 발전을 견인할 수 있는 시설이 될 것으로 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전 세계 사람들이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을 찾는 것처럼 이건희 미술관을 유치하면 그 지역의 관광산업 활성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기대감이다. 이 회장이 기증한 미술품 2300여점은 감정가만 3조 원대로, 국보급 유물은 물론 이름만 대면 아는 국내외 거장의 작품이 다수 포함돼 있다.
특히 자치단체장이나 국회의원 등의 입장에서는 대형사업을 따낸 것에 대한 치적도 될 수 있어 유치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건희 미술관이 실제 조성된다면 그 과정에서 가장 쟁점이 될 부분은 미술관의 위치 선정”이라며 “이건희 미술관같은대형사업은 자칫 유치 경쟁이 과열될 경우 지역 간 갈등으로 번질 수 있는 만큼 투명하고 객관적인 평가 기준부터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창원·부산·수원·광주광역시·세종=위성욱·이은지·최모란·진창일·김방현 기자 w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