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현상의 시시각각

반도체가 빵이라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4월 삼성전자 경기도 화성 사업장에서 열린 시스템 반도체 비전 선포식에서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출하한 EUV(극자외선)공정 7나노 웨이퍼에 서명하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4월 삼성전자 경기도 화성 사업장에서 열린 시스템 반도체 비전 선포식에서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출하한 EUV(극자외선)공정 7나노 웨이퍼에 서명하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30여 년 전 대학 시절, 단과대 공동 연구실에 PC 두 대가 있었다. CPU 성능에 따라 XT·AT로 불렸다. 하드디스크도 따로 없어 요즘 세대들에겐 생소한 플로피디스크를 끼었다 뺐다 하면서 사용했다. 그래도 값은 당시 대기업 초봉 두세 달치와 맞먹었던 거로 기억한다. 눈부신 디지털 기술 발전은 가격에서 체감된다. 얼마 전 휴대용 USB가 필요해 검색했더니 16GB 제품이 몇천원 수준이었다. 2000년대 초 1GB 용량이 처음 나왔을 때 가격이 100만원쯤 해 놀랐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디지털 제품 가격 하락 뒤에는 반도체가 있다. 1980년 메모리 가격은 1MB에 6480달러였다. 지난달 PC용 D램(DDR4 8Gb)의 고정가격은 개당 3.8달러선. 1MB에 0.0037달러꼴이다. 41년 전과 비교하면 거의 200만 분의 1 수준이다. 빛의 속도 기술 발전이 없으면 불가능한 결과다.
 한국 반도체는 이 엄청난 기술 경쟁 압박을 이기고 성장했다. 기술이 중요하지 않은 산업이 있을까마는 반도체에서 기술의 차이는 생사와 직결되는 문제다. 변동비(인건비·재료비)보다 고정비(설비비)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설계 개선과 신형 장비 도입 등을 통해 앞선 미세공정을 확보한 업체는 같은 웨이퍼에서 수십% 많은 칩을 뽑아내 초과 이익으로 연결할 수 있다. 반면 뒤처진 업체는 고통스러운 터널로 들어서게 된다.
 빵 가게라면 1등이 아니더라도 살 길이 없지 않다. 레시피를 바꿔 틈새시장을 공략하거나 가게를 다른 동네로 옮길 수도 있다. 정 안돼 문을 닫으면 인건비·재료비라도 건진다. 그러나 이미 천문학적인 고정비를 쏟아부은 반도체 공장은 가격이 안 맞는다고 공장을 세우기 어렵다. 울며 겨자 먹기로 생산을 계속하며 상황이 좋아질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기술 개발과 투자 여력은 없어지고, 결국은 경쟁력이 떨어져 쓰러지기 십상이다. 일본·독일의 메모리 업체들이 몰락한 과정이다.(정인성 『반도체 제국의 미래』)
 이런 위험이 있기에 1980년대 반도체 사업 착수는 잔도(棧道)를 태우는 결단이었다. 일단 발을 들인 이상 돌이킬 길이 없기 때문이다. 파촉 땅으로 들어가는 유방은 항우의 눈을 속이기 위해 벼랑에 걸린 잔도를 태웠지만, 당시 우리 기업 형편에선 대규모 설비 투자는 그야말로 생사를 건 모험이었다. 이병철 회장이 도쿄에서 반도체 진출을 최종 결심하기 전 며칠 밤잠을 설쳤다는 이야기는 과장이 아니었을 것이다.
삼성이 조 바이든 대통령의 채근에도 미국 투자를 결심하지 못하고 있다. 넉 달 전 텍사스 오스틴에 파운드리(위탁생산) 공장 증설 제안서를 내놓고도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삼성의 망설임은 잔도를 태우듯 돌아 나올 수 없는 반도체 산업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사이 대만 TSMC는 애리조나에 3년 내 5개 공장을 추가로 짓겠다고 발표하면서 미국과의 반도체 동맹에 확실히 올라탔다. 파운드리 사업 강화를 선언한 인텔의 행보도 빨라지고 있다. 과감한 결단으로 기회를 선점했던 과거의 삼성과는 달라진 모습이다. 외신들 사이에선 삼성이 파운드리 분야에서 TSMC를 따라잡기 어려울 것이라는 냉정한 예측이 점점 힘을 얻고 있다.
이병철 회장이 타계한 1987년과 비교하면 지금 우리 경제는 대략 10배 성장했다. 같은 기간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은 1200배 늘었다. 그 결과 우리 정부는 이건희 회장의 상속세 12조원을 선물처럼 받게 됐다. 운도 작용했다. 미국은 반도체 동맹으로 한국을 선택했고, 냉전의 종식은 중국이라는 새 시장을 열었다. 4차 산업혁명의 물결은 반도체 수요를 폭발시켰다. 이제 그 공간이 슬슬 닫힐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과거에 발목 잡혀 주춤대다 언젠가는 "반도체가 빵이라면…"하고 후회할지 모른다. '삼성어천가에 토 나온다'는 사람들의 머릿속으로는 이런 초조감이 결코 실감 나지 않을 것이다.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