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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현기의 글로벌 인사이트

다음달 영국 G7, 한·미·일 3국 정상회담의 적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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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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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어색했다. 5일 영국 런던 주요 7개국(G7) 장관회의에서 만난 정의용 외교장관과 모테기 도시미쓰 일본 외상이 찍은 한장의 기념사진. 악수는커녕 팔꿈치 인사도 없었고, 거리를 두고 뻣뻣이 서 있는 모습은 부모 강요에 마지못해 선보러 나온 커플 같았다.

정의용-모테기 회담은 미국 작품 #한·일 풀기 힘들면 한·미·일로 풀라 #정부 “중재 요청하면 글로벌 호구” #호구 걱정 말고 호구 면할 걱정할 때

‘오염수’와 ‘처리수’ 사이만큼 그 거리는 멀었다. 한·일의 갈등과 불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그러나 한편으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뭔지도 보여줬다.

#1. 최근 들은 외교 비화 한 토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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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전인 2005년 11월 18일 부산. 노무현 대통령은 APEC 정상회의에 참석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 마주 앉자마자 야스쿠니신사 참배, 역사교육 문제, 독도 문제의 ‘3종 세트’를 신랄하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주최국 호스트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표현이 거칠어지기 시작하자 고이즈미는 노 대통령의 말을 가로막으며 “귀하는 내 말을 전혀 이해 못하고 있다”고 맞받아쳤다. 그리곤 노 대통령의 발언 중 돌연 자리를 털고 일어나버렸다. 돌발적 상황에 양국 관계자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뒤도 안 돌아보고 회의장을 나가는 고이즈미의 등을 향해 노 대통령은 버럭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내 얘기 아직 안 끝났단 말이야!”

나중에 전해진 고이즈미의 반응은 더 격했다. “이제 저 인간과는 두 번 다시 안 만나겠어.” 이 만남은 실제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 됐다.

#2. 2015년 위안부 협상

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은 일본 측 대표인 야치 쇼타로 NSC 사무국장과 총 8차례 극비리에 만났다. 그런데 한·일 번갈아 열기로 했던 장소가 8번 내리 인천 송도의 한 호텔이 됐다. 협상 초, 이 실장이 국정원장에서 해외출장 가기 힘든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이동했기 때문이었다. 미안해하는 이 실장에게 야치는 불평 한마디 않았다. 협상 대표 간 신뢰는 지도자 간의 신뢰로 이어졌다.

먼저 위안부 기금 규모. 일본 측은 당초 5억 엔(약 50억원)가량을 내비쳤다. 하지만 이 실장은 “어중간하게 그게 뭐냐. 내 집 팔아 돈을 보태도 좋으니 10억엔(약 100억원)으로 해라”고 버텼다. 야치는 못 이기는 척 수용했다. 아베 총리도 이를 재가했다. 한국 측 요구사항도 거의 다 녹아들어갔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취임 직후 이 합의를 뒤집었다. 그리곤 죽창가, 토착왜구를 외쳤다. 그러다 임기 말이 되자 돌연 위안부 합의를 인정한다고 한다. 또 피해자 승소를 판결한 위안부 판결(지난 1월)에 대해 “곤혹스럽다”(문 대통령)고 한다. 정말 곤혹스러워지는 건 한·일 국민이다.

#3. 회복 힘든 한·일 불신과 반목

전문가들 사이에선 “설령 1년 후 한국의 정권이 바뀐다고 과연 한·일관계가 복원될 수 있을까”란 의문이 나온다. 보수정권, 진보정권 할 것 없이 거친 언사와 무원칙한 대일외교를 거듭한 결과다. G20 주최 호스트를 하면서 한국 대통령 딱 한 명만 안 만나는 일본 외교의 옹졸함까지 더해졌다. 두 나라 지도자에 가망이 없다면 한·일의 꼬인 매듭을 한·미·일을 통해 풀어보는 수밖에 없다. 창피하지만 어쩔 수 없다.

문재인 정부는 그동안 “미국에 (한·일) 중재를 요청하는 건 ‘글로벌 호구’가 되는 것”이라 했다. 트럼프 또한 중재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판이 바뀌었다. 도쿄의 소식통은 “지난달 미·일 정상회담 과정에서 미국은 일본 측에 ‘좀 더 한국에 손을 내밀어라. 우리는 한·미·일을 원한다’는 요구를 했다”고 전했다. 런던에서의 정의용-모테기 20분 회동은 바이든-블링컨(국무장관)의 작품이었던 셈이다.

복기해야 할 장면들이 있다.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으로 한·일 긴장이 고조되자 “우리는 두 동맹국(한·일)의 좋은 관계를 권장한다”는 미 국무부의 이례적 성명이 나왔다. 또 하나. 2014년 네덜란드에서 열린 핵안보정상회의에서 한·일 두 정상(박근혜·아베)은 오바마 미 대통령을 가운데 두고 한·미·일 3국 정상회담 자리에 앉았다. 이후 한·일은 위안부 합의로 나아갔다. 당시도 바이든(당시 부통령)-블링컨(부통령 국가안보보좌관, 백악관 NSC부보좌관)이 움직였다. 그들의 아시아외교 DNA 중심엔 변함없이 ‘한·미·일’이 있다.

그런 점에서 오는 21일 워싱턴에서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을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미국이 먼저 ‘한·미·일’을 압박해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선제적으로 “6월 11일 영국 콘월에서 열리는 G7 정상회의 때 한·미·일 정상회담을 열자”고 제안하자는 얘기다. 지난달 한번 시도하다 무산됐지만 이번 정의용-모테기 회동으로 물꼬는 터졌다. 3국 모두 거절할 명분이 사라졌다. “중국 편 아니야?”란 미·일의 의구심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쿼드(미국·일본·인도·호주의 안보협의체)’에 들어가지 않는 한국이 이런 제안을 했다고 해서 중국이 뭐라 그럴 리도 없다. 그것까지 눈치 보면 나라도 아니다. 잘하면 한·일 정상회담까지 일궈낼 수 있다. 별 합의가 없다 해도 일단 다음 정부에서 한·일 관계 복원을 이뤄낼 수 있는 원동력이 마련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지금은 글로벌 호구 될까 하는 걱정이 아니라, 면할 걱정을 할 때다.

김현기 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