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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혜련의 휴먼임팩트

남성들이 모르는 여성의 열패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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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강혜련 이화여대 경영학과 교수

강혜련 이화여대 경영학과 교수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각 나라의 정치·경제·사회적 발전 배경과 맞물려 다양하게 전개되어왔다. 조직 사다리의 어떤 계층, 어떤 분야에서 성별 불균형이 일어나고 있는지 들여다보면 사실 여성이 주류로 자리매김한 분야는 많지 않다.

여성인구·대학진학률 우세 #직장에서 지위·신분은 열세 #남성은 탄탄한 경력자본 쌓아 #주요직 라인에 여성 채워야

얼마 전 미국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 100일 국회 연설장면이 화제를 모았다. 대통령 뒤에 앉은 여성 부통령과 여성 하원의장 모습을 통해 대통령 유고 시 승계 1, 2순위가 모두 여성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또 다른 장면을 보면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내가 양복 차림에 넥타이를 매고 있었어도 그런 일이 생겼을까.” 이는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지난달 EU-터키 정상회담에서 그녀의 의자를 상석에 배치하지 않은 일명 ‘소파게이트’를 겪은 후 분노하며 한 말이다. 자신이 세계기구의 리더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격에 걸맞는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은 결국 여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최근 우리나라 젊은 층 사이에 젠더 갈등 현상이 있고 남성들이 느끼는 역차별이 그 기저에 깔려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남성이 역차별받았다고 느낄 정도로 우리나라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정말 나아졌는가.

휴먼임팩트 5/7

휴먼임팩트 5/7

우리나라는 2015년 6월을 기점으로 여성 인구가 더 많은 여초(女超) 국가가 되었다. 여학생의 대학진학률도 남학생보다 높다. 그런데 대졸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남성보다 25% 정도 낮으며 여성의 월평균 임금은 남성의 68% 수준이다. 이런 개괄적 지표만으로도 우리나라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아직 열악한 것을 알 수 있다. 최근에 불거진 20대 젊은 남성들의 불만과 역차별 우려는 결국 15~29세 청년층의 체감실업률 25%라는 심각한 고용절벽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청년층의 부족한 일자리가 남녀 간 제로섬 게임으로 인식되는 것을 경계한다.

우리나라 여성의 사회 진출과 각종 영역에서의 성과가 과거보다 월등히 좋아진 것은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다. 하지만 여성들이 조직 생활에서 느끼는 열패감은 여전하다. 학교 다닐 때 공부 잘하고 스펙 좋은 우수한 여성들도 직장생활이 시작되면 쉽게 드러나지 않는 조직의 구조적 문제로 인해 지위와 신분에서 열세에 몰린다. 예를 들어 초·중등교사의 60~70%가 여성이지만 이들을 관리하는 교장·교감의 여성 비율은 30~40% 수준에 그치고 있다. 우리나라 기업체(100인 이상)의 부장급 중 여성은 약 14%, 30대 그룹의 여성 임원은 고작 3% 수준이다. 173개 4년제 일반대학 중 여성 총장은 13명인데, 여자대학 총장 6명을 제외하면 남녀 공학 대학의 여성 총장은 7명(설립자 출신 포함)이다. 4%에 불과하다.

남녀에 대한 인식은 이성적·합리적 판단보다는 문화적 관습, 취향, 뿌리 깊은 관행에 기초하기 때문에 쉽게 변하지 않는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자본(capital)의 관점에서 설명하였고 이는 젠더 불평등 문제에도 적용된다. 조직에서 성공적 커리어를 일군 사람들은 탄탄하게 쌓은 ‘경력자본’ 덕분이다. 경력자본은 학력·스펙 같은 인적 자본과 인맥·정보력 같은 사회적 자본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자본은 다양한 상황의 업무 경험을 통해 본인이 쌓게 되는데 이때 누군가 그런 기회를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지가 중요하다. 남성들은 여러 유형의 끈끈한 선후배 인맥을 발판삼아 그 기회를 잡는다. 대개의 여성은 어려움을 겪고 좌절한다. 하지만 영향력 있는 남성의 사회적 자본을 지원받는 소수의 여성은 성공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정치 분야에서 김대중·노무현 두 전임 대통령은 여성 정치인을 과감히 발탁하여 그들의 경력자본 축적에 크게 기여하였기에 오늘날 민주당에 거물급 여성 정치인들이 다수 있는 것이다.

최근 여성 할당제에 대해 일부 논란이 있지만 청년층의 어려움도 할당제와 같은 잠정적 우대조치 없이는 지금의 견고한 구조적 문제를 돌파하기 쉽지 않다. 성평등 천국이라 불리는 노르웨이의 정책책임자도 구체적 행동계획을 세워 실천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과거의 관행으로 돌아갈 것을 우려하고 경계한다고 하였다. 민간·공공부문 모두 조직의 주요 직위 파이프라인에 여성 비율이 유지될 때 여성들도 커리어 비전을 갖고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경력자본을 쌓을 기회를 만들어주지도 않고 어느 날 느닷없이 여성을 부르면 사고가 날 가능성이 크다.

강혜련 이화여대 경영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