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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도자기 수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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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현예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김현예 P팀 기자

김현예 P팀 기자

“박군, 이것이 무엇이지?” 일본인 교수가 내민 건 접시 한 개. 영문을 몰라 하던 그에게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조선인이 조선의 접시를 몰라서야 말이 되는가.” 지금으로부터 90여년 전인 1929년. 경성대부속병원에서 일하던 26살의 청년 의사 박병래(1903~1974)는 그길로 박물관을 제집처럼 드나들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와 보니 분한 마음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는데, 뭐든 알아야겠단 마음에 마침 병원 건너편에 있던 당시 이왕직 박물관을 찾아간 것이었다. 도자기에 흠뻑 빠진 그는 수집광이 됐다. 환자를 돌보다 퇴근을 하면, 당시 충무로와 명동에 산재해있던 유명 골동품상 12곳을 쭉 돌았다.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사람들과 모임도 만들었다. 접시에서 시작한 취미는 연적과 필통, 백자까지 이어졌다.

도자기 수집에 빠진 그를 걱정한 것은 아버지 박준호였다. (그는 동성고의 전신인 동성상업학교 2대 교장을 지낸 인물이기도 하다) 아들이 월급을 타면 몽땅 도자기를 사들이는 데 쓰고, 용돈이라도 주는 날엔 그날로 도자기를 사러 줄행랑을 쳤던 탓이다.

1935년 서울 저동에 있던 일본인 소유의 병원을 경성구천주교회에서 사들여 성모병원을 세우면서, 박병래는 초대 원장으로 취임했다. 그의 첫 월급은 300원으로 결정되었는데, 아버지는 “젊은 사람이 돈이 많으면 안 된다”며 200원으로 깎도록 했다고 한다. 그는 숨을 거두기 두 달 전인 1974년 3월, 백자청화초화문표형병(보물 1058호) 등 362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미술사학자 최순우(당시 국립중앙박물관 학술연구실장) 선생은 그가 작고하자 박병래가 남긴 이야기를 전했다. “내 나이 칠십 밖에 안되었지만, 이 세상에 와서 90년 살고 갑니다. 의사로서 50년 봉사하고, 이조자기를 아끼는 데 40년이 걸렸어요.”

도자기 수집이 연일 화제다. 박준영 해양수산부장관 후보자 아내가 ‘외교관 이삿짐’으로 영국에서 들여온 그릇과 장식품 등 1000여 점의 도자기다. 박 후보자는 “현지 벼룩시장에서 취미 삼아 샀고, 2019년 말에 카페를 열었는데 손님 중 원하는 분이 있어 일부 판매했다”고 했지만, 야당은 ‘밀수 의혹’이라며 강공을 펼쳤다. 해외 직구를 해도 개인통관 고유 부호를 써내야 하는 마당에, 법을 우회한 도자기 수집이 ‘그릇’된 취미가 됐다.

김현예 P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