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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5·18 복원은 난개발…정부 따라 옷만 바꾸는 식"

중앙일보

입력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와 광주의 민주화 운동을 비춘 다큐멘터리 '좋은 빛, 좋은 공기'를 만든 임흥순 감독. [사진 엣나인필름]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와 광주의 민주화 운동을 비춘 다큐멘터리 '좋은 빛, 좋은 공기'를 만든 임흥순 감독. [사진 엣나인필름]

“넌 어째 해필 얼굴 반짝을 잃어부렸냐. 도청 즐비한 시체들 중 하나가 이상시럽게 마음이 쓰였는디 그게 알고 보니 내 아들이었소.”(김점례‧광주 오월어머니집 회원)

“아이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앉아있었는데 심장에 뭔가 콱 박히는 걸 느꼈어요. 그게 제 아들을 죽이던 순간을 느꼈던 게 아니었을까요.”(리타 보이타노‧부에노스아이레스 실종자 가족 협회 회장)

생김새도 언어도 다른데 아픈 역사는 빼닮았다. ‘빛고을’ 광주(光州)와 ‘좋은 공기(Buenos Aires)’란 뜻의 이름을 가진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지구 반대편 두 도시에선 각각 1980년과 1976~83년 군부독재 정권에 의해 무수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거나 실종됐다.
지난달 28일 개봉한 임흥순(52) 감독의 다큐멘터리 ‘좋은 빛, 좋은 공기’는 양국의 생존자‧유가족 인터뷰를 통해 이런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현재 스크린 수는 20개 남짓, 개봉 후 8일 동안 관객 2900여명을 기록했다. 흥행과는 거리가 먼 수치지만 본 사람마다 잊지 못할 다큐로 꼽는다.

다큐 '좋은 빛, 좋은 공기' 임흥순 감독 #광주-부에노스아이레스 닮은꼴 비극 짚어

광주·아르헨티나·미얀마…반복되는 역사의 비극

임 감독은 여성 노동자의 고난사를 그린 2014년작 ‘위로공단’으로 한국 최초 베니스 비엔날레 은사자상을 받았다. 당시 이 다큐에서 노동현장의 비극을 1960년대 구로공단 여직공부터 2014년 캄보디아 내 한국의류기업 현지 노동자들까지 아울러 짚었다. 이번엔 광주,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관통해 현재진행형인 미얀마의 민주화 시위에 대한 지지까지 담아냈다.
개봉 전 만난 그는 “‘위로공단’ 촬영할 때 캄보디아에서 노동자들이 농성 중 현지 군대에 유혈진압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한국에선 보이지 않지만 반복되는 지점이 있고 작품을 만들면서 그런 현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면서 “이번 작품도 만들던 중에 미얀마 사태가 일어났고 당연히 광주가 떠올랐다”고 돌이켰다.

다큐멘터리 '좋은 빛, 좋은 공기'에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통령궁 앞 5월 광장에 모인 현지 어머니회 회원들이 군부정권 당시 실종된 가족을 찾아달라는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 엣나인필름]

다큐멘터리 '좋은 빛, 좋은 공기'에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통령궁 앞 5월 광장에 모인 현지 어머니회 회원들이 군부정권 당시 실종된 가족을 찾아달라는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 엣나인필름]

이번 영화는 그가 2013년 제주 4‧3사건을 다룬 다큐 ‘비념’ 상영차 광주의 극장을 찾았을 때 한 관객이 “광주 5‧18도 민초에 애정을 가진 시선으로 담아줄 것”을 제안한 일이 계기가 됐다. 이후 광주 트라우마센터에서 5·18 피해자 증언과 치유 프로그램을 접한 그는 2017년 아르헨티나 벨라스아르테 국립미술관 초청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찾았을 때 아르헨티나에서 군사정권 기간 납치‧감금‧강간‧살인 등으로 3만명 이상이 희생당한 사실을 알게 됐다. 광주 오월어머니집과 이름도, 눈물의 세월도 비슷한 아르헨티나 오월광장 어머니회는 대통령궁 앞 5월 광장에서 1977년부터 실종가족을 찾아달라는 침묵시위를 해왔다.

임산부 납치해 군 간부 자녀로 강제 입양

다큐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군부정권 당시 전역에 갈쳐있던 비밀수용소는 가정집, 파출소 등 다양한 형태로 일상공간에 침투했다. 납치된 여성 중 임산부가 출산한 아이들이 군 간부들의 자녀로 강제 입양돼 최근에야 DNA 분석을 통해 진짜 가족을 찾고 정체성의 혼란에 빠진 경우도 많다고 한다. 군부에 약물을 주입당해 비행기에서 강으로 던져진 이들은 시신조차 찾기가 쉽지 않다.

다큐멘터리 '좋은 빛, 좋은 공기'에서 광주 5.18 유가족이 희생자의 사진을 들고 있다. [사진 엣나인필름]

다큐멘터리 '좋은 빛, 좋은 공기'에서 광주 5.18 유가족이 희생자의 사진을 들고 있다. [사진 엣나인필름]

광주에서도 실종자들의 암매장에 대한 계엄군의 고백, 군 기록 등이 최근에야 나온 터다. 당시 유혈 참상을 담은 사진들과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증언, 유해 발굴 현장 등 양국을 오가는 다큐 화면은 점차 어느 장면이 어느 나라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겹쳐져간다.

양국 청소년 영상교류…고통을 나누는 방법

다큐멘터리 '좋은 빛, 좋은 공기'에서 광주-아르헨티나 양국 영상교류 워크숍에 참여한 광주의 청소년들. [사진 엣나인필름]

다큐멘터리 '좋은 빛, 좋은 공기'에서 광주-아르헨티나 양국 영상교류 워크숍에 참여한 광주의 청소년들. [사진 엣나인필름]

“이런 상황을 이후 세대한테 알리는 게 필요한 것 같다”는 임 감독은 이번 다큐에 광주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고등학생들이 참여한 영상 교류 워크숍 ‘거울-당신의 고통을 나누는 방법’을 포함시켰다. 양국 학생들이 각자 일상과 공간, 역사의 흔적 등을 촬영해 서로 보내주고 상대방이 준 영상에 편집·내레이션을 더해 완성하는 작업을 2018년‧2019년 두 차례 진행했다.
그는 “당시를 겪은 분들이 다 10대, 20대 초반이 많았기 때문에 그 세대가 경험해보고 생각해보는 게 중요했다”고 돌이켰다.

한국은 정부 따라 '옷만 바꾸는' 복원, 아르헨티나 달라

닮은꼴 두 도시의 차이로 그는 기억의 복원 방식을 꼽았다. 한국의 경우 “복원은 여전히 없애고, 지우고, 덮어버리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왔다. 역사를 대하는 방식 또한 많은 부분 국가권력에 의한 난개발의 형식과 흡사하다”면서 옛 전남도청이 2015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건립 당시 리모델링되며 역사성‧상징성‧장소성이 훼손됐다고 비판받은 것을 사례로 들었다. “아직 발굴 중인 불법 감금소의 흙 한 줌도 가져가지 못하게 하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을 만나면서, 3년여 기간 동안 최후 항쟁지 복원을 위해 농성을 하고 있는 광주 5‧18 어머니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면서다.

다큐멘터리 '좋은 빛, 좋은 공기'에서 군부독재에 의한 국가폭력 희생자의 유골 발굴 모습이다. [사진 엣나인필름]

다큐멘터리 '좋은 빛, 좋은 공기'에서 군부독재에 의한 국가폭력 희생자의 유골 발굴 모습이다. [사진 엣나인필름]

복원되고 발굴된 장소와 사물들은 단순히 정신적 차원의 기억의 행위에서 나아가 투쟁의 증거물로서 국가폭력을 증언하는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아르헨티나는 원형 그대로 발굴한 비밀감금소를 ‘기억의 공간’ 박물관 등으로 운영하고 있다.
“한국은 새롭게 리모델링한다고 하지만, 어떻게 보면 원래 모습이 훼손되는 부분도 생기는 것 같거든요. 그게 복원은 아닌 것 같아요. 복원이란 당시 상황을 그대로 보존하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계속해서 발굴하는 게 중요한데요. 한국은 정부 따라, 예산 따라 다른 상황이 되는 한국적 특성 때문에 복원을 하긴 하는데 사람으로 치면 정신이나 감정은 그대로고 옷만 계속 바꾸는 것 같거든요. 새옷 입는다고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게 아니잖아요. 아르헨티나의 복원 상황을 한국에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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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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