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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언의 시시각각

정권 포기 징후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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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검찰총장 후보자로 지명된 김오수 전 법무부 차관이 4일 서울 서울고검으로 출근하고 있다. [뉴시스]

검찰총장 후보자로 지명된 김오수 전 법무부 차관이 4일 서울 서울고검으로 출근하고 있다. [뉴시스]

임영웅이 무대에서 내려갔으면 다음에는 영탁이나 정동원 정도는 나와야 한다. 그래야 채널 고정 확률이 높다. 급이 전혀 다른, 패자부활전 단골 가수를 들이밀면 눈치 빠른 시청자들이 바로 알아챈다. ‘PD가 사심이 있구먼’. 리모컨 집어 든다.

본선 4등 인물 검찰총장 시키고 #백신과 부동산 문제 외면 일관 #야당도 정권 탈환 뜻 의심스러워

윤석열의 화려한 스테이지가 끝난 뒤에도 관객들 시선은 무대에 꽂혀 있었다. ‘다음 선수는 누구일까’라는 마음으로 지켜봤다. 입상 7회 노미네이티드, 그러나 번번이 심사위원들한테 퇴짜 맞아 트로피 손에 쥔 적은 없는 이가 호명됐다. 본선 4등이었는데 수상한 점수 추가로 1등이 돼 나타났다. 고진감래. 느닷없이 경연이 ‘인간극장’ 다큐로 돌변했다.

이쯤 되면 이건 윤석열 띄워주기 아니냐고 의심할 만하다. 그가 정말 밉다면 후속 타자에 에이스를 내세워 물을 먹였어야 했다. 윤석열만 잘난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줘 확 김을 뺐어야 했다. 정말 선수가 없었나. 아니면 다른 큰 그림이 있는 걸까.

훌륭한 새 검찰총장이 필요한 건 비단 윤석열 열풍을 잠재우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권력의 순조로운 하산에도 결정적이다. 지난 재·보궐 선거에서 한국토지주택공사(LH) 사태가 보여줬다. 지지부진한 비리 척결이 민심을 얼마나 흔드는지. 총리가 검찰에 나서라고 지시했지만 “무장해제를 요구하더니 갑자기 전쟁터로 나가라고 한다”는 볼멘소리를 하며 먼 산만 바라봤다. 경찰 국가수사본부(국수본)라는 곳에서 비리 연루자들을 띄엄띄엄 불러들였다. 임팩트가 없었다. 지금도 누가 잡혀갔는지, 그가 얼마나 혼꾸멍나고 있는지 국민은 잘 알지 못한다. 수습이 되지 않는다.

정권 말기엔 온갖 비리 의혹이 터진다. 논공행상에서 소외됐던 권력의 주변인들이 더는 참지 못하고 입방정을 떤다. 떠오르는 미래 권력에 줄을 대려고 달려드는 부나방들이 은밀한 정보를 퍼 나른다. 권력의 그립은 약해지고 내부자들의 원심력은 커간다. 쭉 그래 왔다. 그때 정권 폭망을 최전선에서 막은 건 검찰이었다. 피고름이 비치는 곳에 칼을 댔다. 때로는 대통령의 측근, 가족에게까지 닿았다. 검찰은 가지를 잘라 몸통을 지키는 결과적 충성을 했다.

그 ‘황제의 칼’을 정권 스스로 포기했다. 칼을 내려놓게 하고 호미·곡괭이를 들려줬다. 진격을 외쳐도 다들 옆만 쳐다보게 할 지휘관이 선두에 있다. 칼끝 방향이 180도 바뀌는 회군을 상상하는 심약한 군주 곁에 오합지졸만 남았다.

이것이 검찰 만능주의라는 고질병을 치유하기 위한 극약 처방이라면 명분이 없는 행동은 아니다. 하지만 진의가 그것이었다면 예비적 조치가 선행됐어야 정상이다. 국수본이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제대로 진용을 갖추도록 하고 실효성 검증을 해야 했다.

그래서 정권이 재집권을 원하지 않는 것 아니냐는 생각마저 든다. 포기 징후는 또 있다. 백신 때문에 성난 국민이 많은데, 대통령은 모든 게 순조롭다고 말해 화를 돋운다. 대통령이 자신을 비방했다고 모욕죄를 걸어 백성을 고소한다(결국 소는 철회했다). 치솟은 아파트값과 이에 따른 세금 부담 때문에 난리라 선거 전에는 뭐든 할 기세를 보이더니 언제 그랬느냐고 한다. 20대한테 잘할 것처럼 말하더니 태도를 바꿔 똑바로 살라고 얼굴을 붉힌다. 자기편 1등 주자가 식구인지 아닌지 헷갈려 한다.

그런데 야당도 마찬가지다. 선거 한 번 이기더니 2년 전 레퍼토리로 돌아갔다. 흘러간 인물들이 다시 앞자리로 나선다. 마땅한 대선 후보도 없는데 끼리끼리 뭉쳐 다니기 시작했다. 윤석열 카드를 놓고 자기들끼리 복잡하게 계산한다. 당사자 생각은 알지도 못하면서. 정권 탈환 의지가 의심스럽다.

자기 돈 쓰면서 욕먹는 자리라며 동창회장·동호회장을 서로 마다하는 경우가 있다. 지금 이 현상이 그런 것이라면 아름다운 풍속의 발현일 텐데 진짜 마음을 비운 것 같지는 않다. 저급하고 유치한 정치에 국민이 피곤하다.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