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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아동학대 초래하는 긴급돌봄 실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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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배기수 아주대 의대 소아청소년과 교수

배기수 아주대 의대 소아청소년과 교수

소파 방정환 선생이 주도해 1923년 제정한 어린이날(5일)이 내년이면 드디어 100년이 된다. 하지만 어린이들이 안전하고 행복한 나라는 아직 요원하다. 잊을 만하면 충격적인 아동학대와 살해·유기 사건이 터진다.

어린이날에 돌아보는 학대 사건들 #긴급돌봄 내용과 품질 개선 시급

3세 미만의 두 아이를 혼자 모텔방에서 돌보던 아빠(27)가 작은 아이를 내던져 중상을 입히고 구속되는 안타까운 사건이 지난달 수도권에서 발생했다. 이 사건을 표면적으로만 보면 아이가 중상을 입었으니 명백한 아동학대가 맞다.

하지만 내막을 좀 더 살펴보면 긴급돌봄 행정의 실패라는 구조적 문제가 엿보인다. 이번 사건은 어쩌면 한국사회에 만연한 위기가정에 대한 긴급돌봄 행정의 수준을 가름해 볼 시험대일 수 있다.

이 가족의 안타까운 사연을 좀 더 살펴보자. 집세를 못 내 돌 무렵 아들을 데리고 모텔 생활을 전전하던 20대 부부는 사건 발생 두 달 전 모텔방에서 둘째를 낳았다. 모텔 주인의 도움으로 구청에 연락이 닿아 위기가정 지원을 받던 중 연락이 끊겼다. 방값을 내기 어려웠거나 더 싼 곳으로 옮겼던 것 같다. 구청은 매뉴얼대로 해당 가족의 주거지 파악을 경찰에 의뢰했다.

국가의 긴급돌봄 손길이 다시 닿으려던 와중에 이 가족을 찾아낸 경찰은 아이 엄마(22)가 보증금 사기 사건 수배자란 사실이 드러나자 젖먹이를 떼어내고 긴급체포해 구속했다. 당시 남은 가족은 아빠와 아들(19개월)·딸(2개월) 3명이었다. 경찰에서 한 진술 등을 보면 이때부터 아빠는 ‘지옥’을 경험한 것 같다. 엄마가 구속된 엿새 뒤 아빠가 아이를 탁자에 내던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결국 엄마에 이어 아빠도 구속되면서 아들은 보육시설로, 딸은 병원에 입원했다. 순식간에 가족이 풍비박산 났다.

아동학대는 대체로 양육 의지가 없는 무책임하고 나쁜 부모에 의해서 생기지만, 충실한 양육 의지가 있는 부모라도 극한적 환경을 견디다 못해 발생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필자의 사례 분석에 따르면 기저귀 차고 24시간 울어대는 아이 두 명을 돌보며 일주일 이상 잠을 못 잔 아빠는 대개 정신착란에 가까운 상태를 경험한다. 이런 상황이 지속하면 온전한 정신상태를 유지하기 어렵고 아동학대를 일으킬 위험에 노출된다. 이런 경우 아이를 두고 잠적하는 아빠도 있고, 이번 사건처럼 울음을 그치도록 다그치다 내던지는 학대 사례도 적지 않다. 심지어 가족 전체가 극단적 선택을 하는 비극도 발생한다.

이런 연유로 선진국은 아동학대 고위험자인 어린 부모에게 하루에 몇 시간이라도 편히 잠잘 수 있도록 아이를 대신 돌봐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예견되는 학대 참사를 최대한 막기 위해서다.

이번 사건 대응 과정에서 경찰·구청·복지센터는 규정과 절차대로 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경찰이 엄마를 긴급 체포해 구속하지 않았다면, 아빠가 극한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세심한 돌봄 서비스를 제공했다면 이 가족의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 것 같아 안타깝다.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나서야 한다’던 말을 새삼 곱씹어 본다.

2006년 이후로 출산장려금이 200조원 넘게 집행됐다. 그런데도 지난해 출산율은 0.84명으로 세계 최하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런 대한민국에서 생계를 위해 빌린 돈 1100만원 관련 사기 피의자란 이유로 앞뒤 따지지 않고 젖먹이 엄마를 구속하고, 엄마와 젖먹이를 분리하는 행정은 지극히 형식적인 일 처리 아닌가.

정부는 막대한 저출산 예산이 출산 관련 간접사업 모두를 포함했다고 변명하지만, 위기가정 하나 신속하고 따뜻하게 지원할 예산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위기가정 대응 매뉴얼에 사람을 우선하는 휴머니즘이 결핍된 게 더 문제다. 긴급돌봄 정책은 이제 형식과 양을 넘어 내용과 질을 따져야 한다. 다친 아이의  회복과 이 가족의 정상화를 기도한다.

배기수 아주대 의대 소아청소년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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