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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린 악기로 한예종 합격, 아스퍼거 증후군 지원이는 또 연습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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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한예종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있는 강지원 학생이 서울 노원구 집에서 어머니 김미경 씨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강지원 학생은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지만 천부적인 재능을 인정 받아 국내 최대 사모펀드인 MBK파트너스가 운영하는 장학재단에 미래 영재로 선정돼 전액 장학금을 받고있다. 김성룡 기자

한예종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있는 강지원 학생이 서울 노원구 집에서 어머니 김미경 씨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강지원 학생은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지만 천부적인 재능을 인정 받아 국내 최대 사모펀드인 MBK파트너스가 운영하는 장학재단에 미래 영재로 선정돼 전액 장학금을 받고있다. 김성룡 기자

초록빛 나무들로 봄기운이 완연한 5월. 서울 상계동의 오래된 아파트 단지 사이로 선명한 바이올린 소리가 흘러나온다. 올해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에 입학한 강지원(19) 학생이 연습하는 소리다. 코로나19 탓에 아침 9시에 비대면 수업을 한 뒤 학교에 가서 실기 수업을 하고 집에와선 과목마다 과제를 하느라 하루가 짧다.
“6월에 실기시험이 있어서 하루에 6~7시간씩 연습해요. 주말엔 더 하구요.”
연습한 바이올린을 소중히 케이스에 넣는 모습이 여느 새내기와 다름없지만 그의 삶은 조금은 특별하다.

신생아 시절 지원이는 외부감염으로 전신패혈증이 와 살아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했다. 하지만 작은 생명은 몸 안의 피 85~90%를 교체하는 교환수혈을 받으며 버텼고 기적처럼 살아났다.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이번엔 언어 발달이 느리고 엄마와 눈도 잘 맞추지 못했다. 수년간 병원을 쫓아다닌 끝에 받은 진단은 아스퍼거증후군이었다. 지능은 높지만 사회성이 떨어지는 게 특징인데, 당시 국내엔 잘 알려지지 않아 어머니의 김미경 씨의 마음고생이 심했다.

음악을 하게 된 건 우연이었다. 7살 때 조율사가 집으로 와 피아노를 조율하고 있었는데 거실에서 놀던 지원이가 “엄마, 저 음 틀렸어”라고 지적한 것이다. 아이는 음역의 간격을 인지하고 악기 소리를 들려주면 바로 따라 연주해낼 정도로 음감이 뛰어났다. 어머 “제가 부족한 가정형편에 성악을 전공하며 고생을 많이 해서 아이는 안 시키려고 했지만 아이에게 자존감을 느끼게 해 주려고 음악을 가르치게 됐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한 지원이는 1년 만에 서울시교육청 영재원에 합격했다. 중학교 시절 한예종 영재원에도 합격했다. 하지만 악기는 허름했고 레슨비도 부족했다. 지원이는 마루에 악보를 펴 놓고 유튜브로 연주 동영상을 보면서 새벽까지 음을 맞춰가며 공부를 했다.

바이올린이 왜 좋을까. “바이올린 소리는 마음하고 비슷해요. 기분이 좋으면 기쁜 소리가 나오고 나쁠 때는 거친 소리가 나요. 우울할 때는 엄청나게 슬픈 연주가 나와서 엄마는 연주를 들으면 제 기분을 알 수 있다고 하세요.” 그는 “제 말투가 로봇처럼 딱딱하고 친구 사귀기가 좀 힘들지만 힘들 때 바이올린을 켜면 그만큼 집중이 잘 된다”며 수줍게 말했다.

지원이는 영재원에서 빌린 바이올린으로 ‘예술인 사관학교’로 불리는 한예종에 당당히 합격했다. 하지만 한 부모 가정에서 감당하기엔 등록금이 너무 비쌌다. 그때 영재원의 지인이 MBK장학재단이란 곳에서 장학생을 선발한다는 정보를 알려줬고 김 씨는 부랴부랴 서류를 넣었다.

매해 12월31일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소원을 적어넣는 유리병. 이뤄진 소원이 적힌 종이는 꺼내는데, 어느 새 병안의 두루마리가 꽤 줄었다. 이소아 기자

매해 12월31일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소원을 적어넣는 유리병. 이뤄진 소원이 적힌 종이는 꺼내는데, 어느 새 병안의 두루마리가 꽤 줄었다. 이소아 기자

지원이는 장롱 위에서 알록달록한 종이가 담긴 유리병을 꺼내 보여줬다. 매년 TV에서 제야의 종소리를 들려줄 때 어머니와 지원이, 동생이 모여 새해소원을 적어 넣는 병이다. 올해는 ‘대학에 꼭 다닐 수 있게 주세요’라는 소원을 적어 넣었다. 지난 1월 말, 장학재단으로부터 합격 통지를 받고 소원이 이뤄졌을 때 세 식구는 너무 좋아서 펄쩍펄쩍 뛰며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서울 노원구 청원고등학교 비대면 졸업식에서 어머니 김미경 씨와 지원이가 선생님들과 친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모습. 사진 개인 제공 영상 캡처

서울 노원구 청원고등학교 비대면 졸업식에서 어머니 김미경 씨와 지원이가 선생님들과 친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모습. 사진 개인 제공 영상 캡처

지원이는 “면접할 때 고등학교 졸업식 때 선생님들께 들려드렸던 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연주했다”며 “떨어졌더라면 (입학의)꿈을 못 이뤘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당시 면접위원이었던 김병주 MBK장학재단 이사장(MBK파트너스 회장)은 “수줍게 얘기하던 지원이가 바이올린을 연주하자마자 자신감과 열정이 넘치는 한 명의 음악가로 변신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깊었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이 사재를 출연해 만든 MBK장학재단은 2007년부터 매년 10여명의 장학생을 선발해 대학 등록금과 교재비 등을 일체 지원하고 있다.

지원이에게 대학은 ‘배움의 전당’이다. 인터뷰 내내 “대학에 와서 제가 너무 부족하다는 걸 알게 됐다. 잘하는 친구들과 선배들에게 배울 게 너무 많다”고 말했다. 스트레스받을 것 같다고 하자 지원이는 대뜸 “그게 스트레스받을 일이 뭐가 있어요. 떨리면 연습이 덜 된 거잖아요”라고 했다. 마치 자신에게 하는 말 같다.

목표는 솔직하다. “학교 교수님, 선배·친구들처럼 잘하고 싶어요. 똑같은 곡이라도 사람마다 표현하는 게 다르잖아요. 꾸미지 않고 진실하게 연주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연주자가 되고 싶어요. 그러려면 실수를 안 하는 실력을 갖춰야 해요.”
늘 배울 점을 찾고 자신에겐 엄격한 지원이는 이미 음악가의 길에 성큼 들어서 있다.

이소아 기자 ls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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