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빛 나무들로 봄기운이 완연한 5월. 서울 상계동의 오래된 아파트 단지 사이로 선명한 바이올린 소리가 흘러나온다. 올해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에 입학한 강지원(19) 학생이 연습하는 소리다. 코로나19 탓에 아침 9시에 비대면 수업을 한 뒤 학교에 가서 실기 수업을 하고 집에와선 과목마다 과제를 하느라 하루가 짧다.
“6월에 실기시험이 있어서 하루에 6~7시간씩 연습해요. 주말엔 더 하구요.”
연습한 바이올린을 소중히 케이스에 넣는 모습이 여느 새내기와 다름없지만 그의 삶은 조금은 특별하다.
신생아 시절 지원이는 외부감염으로 전신패혈증이 와 살아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했다. 하지만 작은 생명은 몸 안의 피 85~90%를 교체하는 교환수혈을 받으며 버텼고 기적처럼 살아났다.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이번엔 언어 발달이 느리고 엄마와 눈도 잘 맞추지 못했다. 수년간 병원을 쫓아다닌 끝에 받은 진단은 아스퍼거증후군이었다. 지능은 높지만 사회성이 떨어지는 게 특징인데, 당시 국내엔 잘 알려지지 않아 어머니의 김미경 씨의 마음고생이 심했다.
음악을 하게 된 건 우연이었다. 7살 때 조율사가 집으로 와 피아노를 조율하고 있었는데 거실에서 놀던 지원이가 “엄마, 저 음 틀렸어”라고 지적한 것이다. 아이는 음역의 간격을 인지하고 악기 소리를 들려주면 바로 따라 연주해낼 정도로 음감이 뛰어났다. 어머 “제가 부족한 가정형편에 성악을 전공하며 고생을 많이 해서 아이는 안 시키려고 했지만 아이에게 자존감을 느끼게 해 주려고 음악을 가르치게 됐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한 지원이는 1년 만에 서울시교육청 영재원에 합격했다. 중학교 시절 한예종 영재원에도 합격했다. 하지만 악기는 허름했고 레슨비도 부족했다. 지원이는 마루에 악보를 펴 놓고 유튜브로 연주 동영상을 보면서 새벽까지 음을 맞춰가며 공부를 했다.
바이올린이 왜 좋을까. “바이올린 소리는 마음하고 비슷해요. 기분이 좋으면 기쁜 소리가 나오고 나쁠 때는 거친 소리가 나요. 우울할 때는 엄청나게 슬픈 연주가 나와서 엄마는 연주를 들으면 제 기분을 알 수 있다고 하세요.” 그는 “제 말투가 로봇처럼 딱딱하고 친구 사귀기가 좀 힘들지만 힘들 때 바이올린을 켜면 그만큼 집중이 잘 된다”며 수줍게 말했다.
지원이는 영재원에서 빌린 바이올린으로 ‘예술인 사관학교’로 불리는 한예종에 당당히 합격했다. 하지만 한 부모 가정에서 감당하기엔 등록금이 너무 비쌌다. 그때 영재원의 지인이 MBK장학재단이란 곳에서 장학생을 선발한다는 정보를 알려줬고 김 씨는 부랴부랴 서류를 넣었다.
지원이는 장롱 위에서 알록달록한 종이가 담긴 유리병을 꺼내 보여줬다. 매년 TV에서 제야의 종소리를 들려줄 때 어머니와 지원이, 동생이 모여 새해소원을 적어 넣는 병이다. 올해는 ‘대학에 꼭 다닐 수 있게 주세요’라는 소원을 적어 넣었다. 지난 1월 말, 장학재단으로부터 합격 통지를 받고 소원이 이뤄졌을 때 세 식구는 너무 좋아서 펄쩍펄쩍 뛰며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지원이는 “면접할 때 고등학교 졸업식 때 선생님들께 들려드렸던 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연주했다”며 “떨어졌더라면 (입학의)꿈을 못 이뤘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당시 면접위원이었던 김병주 MBK장학재단 이사장(MBK파트너스 회장)은 “수줍게 얘기하던 지원이가 바이올린을 연주하자마자 자신감과 열정이 넘치는 한 명의 음악가로 변신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깊었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이 사재를 출연해 만든 MBK장학재단은 2007년부터 매년 10여명의 장학생을 선발해 대학 등록금과 교재비 등을 일체 지원하고 있다.
지원이에게 대학은 ‘배움의 전당’이다. 인터뷰 내내 “대학에 와서 제가 너무 부족하다는 걸 알게 됐다. 잘하는 친구들과 선배들에게 배울 게 너무 많다”고 말했다. 스트레스받을 것 같다고 하자 지원이는 대뜸 “그게 스트레스받을 일이 뭐가 있어요. 떨리면 연습이 덜 된 거잖아요”라고 했다. 마치 자신에게 하는 말 같다.
목표는 솔직하다. “학교 교수님, 선배·친구들처럼 잘하고 싶어요. 똑같은 곡이라도 사람마다 표현하는 게 다르잖아요. 꾸미지 않고 진실하게 연주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연주자가 되고 싶어요. 그러려면 실수를 안 하는 실력을 갖춰야 해요.”
늘 배울 점을 찾고 자신에겐 엄격한 지원이는 이미 음악가의 길에 성큼 들어서 있다.
이소아 기자 lsa@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