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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케인스, 마르크스, 러다이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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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규항 작가·『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김규항 작가·『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20세기 초까지 부르주아 경제학은 공급이 수요를 결정하며, 공급과 수요는 일치하므로 과잉생산이나 과잉공급 같은 건 없다는 ‘세이의 법칙’을 따랐다. 화폐 없는 물물교환 경제에서나 성립할 조야한 논리를 무너뜨린 건 존 메이너드 케인스다. 그는 자본주의 경제를 견인하는 건 공급이 아니라 수요이며, 경기 침체나 후퇴를 막으려면 경제를 시장에만 내맡기는 자유방임주의를 벗어나 정부가 거시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케인스주의는 2차대전 후 30여 년 동안 자본주의 경제의 기조가 된다.

케인스의 백년 예언이 빗나간 이유 #노동시간 아닌 일자리만 줄어들어 #자본주의 기술혁신의 원인과 결과 #산업혁명은 자연의 변화가 아니다

대공황이 임박한 1928년, 케인스는 케임브리지대학 학부생을 상대로 ‘우리 손주 세대를 위한 경제적 가능성’이라는 제목의 특강을 했다.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의심과 회의가 배우고 똑똑한 청년들을 사로잡고 있었다. 케인스는 약간의 수정과 보완만 한다면, 결국 자본주의가 최선의 경제 시스템임을 설파한다. 그는 예언한다. 자본주의가 생산력 발전과 축적을 지속함으로써, 백여 년 후엔 모든 사람이 주 15시간만 일하고 살게 될 것이다.

예언의 절반은 진즉에 실현되었다. 자본주의는 대개의 사람이 주 15시간 정도 노동하면 적절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생산력과 축적 상태에 있다. 그러나 ‘주 15시간 노동’은 여전히 꿈같은 이야기다. 선진국 소리를 듣는 한국은 법정 노동시간을 주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바꾸는 걸 두고 논란을 벌인다. 이상하지 않은가? 왜 15시간만 노동하면 충분한데 그 몇배를 노동해야 할까? 왜 노동시간은 줄지 않고 일자리만 줄어들까?

자본주의라서다. 케인스는 자본주의에서 활발한 기술 혁신이 생산력 발전과 축적을 낳는다는 걸 파악했지만, 자본주의에서 기술 혁신이 일어나는 원인과 그 결과는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그 문제를 명료하게 해명한 건 칼 마르크스였다. 마르크스는 기술 혁신과 기계 도입은 당연히 인간의 수고를 덜어주지만, ‘자본주의적 사용’에선 반대로 인간을 더 고단하고 고통스럽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 원인은 자본주의에서 기술 혁신의 목적은 인간의 더 나은 삶이 아니라 자본의 이윤 추구에 있기 때문이다.

애초 매뉴팩처 자본주의에서 기계가 도입되는 역사적 과정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기계는 오로지 더 많은 잉여가치를 뽑아내기 위해서만 도입되었다. 기계를 도입하여 얻는 잉여가치가 기존 생산 방식으로 얻는 잉여가치보다 적은데 새로운 기계를 도입하는 자본가는 없었다. 마르크스는 그런 이치를 설명하기 위해 영국의 운하에서 배를 끄는 일에 말 대신 임금이 싼 여성이 고용되는 극단적 사례를 들기도 한다. 로봇이나 인공지능 같은 현재의 기계도 물론 마찬가지다.

케인스가 마르크스를 제대로 읽었더라면 빗나간 예언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괜한 소리가 아니라, 버나드 쇼는 대공황 시기 케인스에게 마르크스를 읽어볼 것을 권한 바 있다. 케인스는 원로의 권유를 못 이기는 체 받아들인다. 얼마 후 그는 ‘『자본』이 경제학적 가치는 없는 책이며, 『코란』과 함께 인류의 절반을 잠식할 수 있었던 이유를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한다.

케인스의 예언 일화는 오늘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을 둘러싼 어수선한 상황에 교훈을 준다. 18세기에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생산력을 가진 기계가 출현했을 때도, 인간이 훨씬 편하고 여유롭게 살게 될 거라 낙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인간이 기계에 포박되어 훨씬 더 오래 노동하고, 일자리를 빼앗기고, 여성과 아동까지 끌려나와 노동하는 생지옥이었다. 바로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이다.

‘4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변화가 산업혁명이라 보긴 어렵다는 비판들은 대체로 합리적이다. 그러나 이 변화가 산업혁명인가 아닌가 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이 변화를 다들 ‘자연의 변화’처럼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혁명이라 불릴 만큼 기술 혁신이 진행되는데  왜 노동시간은 줄지 않고 일자리만 줄어드는가, 질문하지 않는다. 이런 변화가 왜 필요하며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항의하지 않는다. 우파도 좌파도, 심지어 다른 통찰이나 직관을 기대해 봄직한 지식인이나 예술가도, 모두 함께 앵무새라도 된 듯 “4차산업 시대를 맞아”라고만 말한다.

19세기 초 산업혁명이 한창 무르익어가던 영국에서 일어난 러다이트 운동은 흔히 기계에 대한 노동자의 분풀이 폭동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러다이트는 질문이자 항의였다. 왜 기계가 인간의 수고를 더는 게 아니라 인간을 더 고통스럽게 만드느냐는 질문이자, 그런 기계는 거부한다는 항의였다. 러다이트 노동자들은 거대한 사회 변화 앞에서, 적응하고 살아남을 궁리만 한 게 아니라, 그 본질을 직시하고 주인으로서 맞섰다. 교육 수준이나 시민 의식에서, 시스템에 대한 질문과 항의가 초래할 상황의 야만성에서 현재와는 비교하기 어려운 시대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우리의 교육과 시민의식, 민주주의 정치 같은 것들이 우리가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일엔 도움이 되지 않거나, 심지어 거스르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한다.

김규항 작가·『고래가 그랬어』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