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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교과서에도 실린 동요 만든 '반달 할아버지' 댁 놀러가요

중앙일보

입력

서울 강북구에 있는 윤극영 가옥 전경. 윤극영 선생이 1988년 작고할 때까지 산 집으로, 서울시에서 매입하고 유품을 기증받아 2014년 10월부터 일반에 개방했다.

서울 강북구에 있는 윤극영 가옥 전경. 윤극영 선생이 1988년 작고할 때까지 산 집으로, 서울시에서 매입하고 유품을 기증받아 2014년 10월부터 일반에 개방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반달') 둘이서 마주 앉아 상대방의 손바닥을 치며 즐기던 손뼉치기(쎄쎄쎄)에서 자주 불렀던 이 노래와 설날이면 떠오르는 "까치 까치설날은 어저께고요 /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설날') 동요를 작곡한 주인공이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 알고 있나요. 바로 동요 작곡가이자 아동문화운동가 고(故) 윤극영(1903~1988) 선생입니다. 윤 선생은 앞서 언급한 '반달' '설날'을 비롯해 한평생 700여 곡의 동요를 남겨 우리나라 어린이 문화 운동에 크게 기여했죠. 김나윤 학생기자와 이서정 학생모델이 제99회 어린이날을 앞두고 서울시 강북구에 있는 윤극영 가옥에서 그의 발자취를 살펴보기로 했어요. 안효경 활동 간사가 윤 선생의 문패가 걸린 대문 앞에서 이들을 맞이했죠.

 우리나라 어린이들을 위해 평생 700여 곡의 동요를 만든 윤극영(1903-1988) 선생. '반달' '설날' '귀뚜라미' '고기잡이' 같은 곡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이 즐겨 부른다.

우리나라 어린이들을 위해 평생 700여 곡의 동요를 만든 윤극영(1903-1988) 선생. '반달' '설날' '귀뚜라미' '고기잡이' 같은 곡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이 즐겨 부른다.

윤극영 가옥은 윤 선생이 1988년 작고할 때까지 12년간 거주한 자택이에요. 서울시에서 매입해 2014년 10월부터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있죠. 꽃이 흐드러지게 핀 아담한 마당을 지나 현관문을 열고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3개의 전시실이 등장합니다. 소중 학생기자단이 제일 먼저 둘러본 곳은 안방에 해당하는 생전 재현실입니다. 윤 선생이 직접 썼던 안경과 원고들, 생활 소품이 그대로 보존돼 있어요.

윤극영 선생이 직접 붓으로 써 내려 간 그가 작곡한 동요 '따오기'의 가사가 액자 형태로 전시돼 있다.

윤극영 선생이 직접 붓으로 써 내려 간 그가 작곡한 동요 '따오기'의 가사가 액자 형태로 전시돼 있다.

"유품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건 액자예요. 윤 선생은 생전 시화전(詩畫展·시와 그림을 전시하는 전람회)을 여러 번 개최했어요. 화가들이 그린 그림 위에 그가 작사·작곡한 동요의 노랫말을 써서 작품으로 선보인 전시로 '반달전'이라 합니다."(안) 반달전은 1979년과 1984년에는 서울 출판문화회관에서, 1986년엔 광주 화니 미술관에서 열렸어요. 특히 '반달'의 탄생 60주년을 기념해 열린 1984년 반달전의 수익금은 무궁화 심기 운동 기금으로 썼죠. 윤 선생은 일본의 벚꽃이 아닌 우리나라 꽃인 무궁화가 우리나라 방방곡곡에서 사랑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동요 작사·작곡 외에 무궁화 보급 운동도 펼쳤습니다. 이는 평생 아이들에게 우리 민족의 정서를 물려주고자 애쓴 그의 정신이 잘 드러난 사례죠.

윤극영 선생이 사용했던 생활 소품들.

윤극영 선생이 사용했던 생활 소품들.

1903년 9월 6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서 태어난 윤 선생은 본래 법관을 꿈꾸던 법학도였어요. 하지만 1921년 경성법학전문학교(지금의 서울대학교 법대)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에 있는 동양음악학교에서 성악과 바이올린을 전공했죠. "클래식을 공부하신 분이 왜 아이들을 위한 노래를 만들게 되었나요?" 서정 학생모델이 물었어요. "일본에서 성사된 소파 방정환 선생과 만남이 중요한 기점이 됐어요. 방 선생은 일제가 조선 어린이들에게서 우리의 말과 글을 뺏으면 정신까지 점령당할 것이라 걱정했어요. 그래서 어린이들을 위한 일을 함께할 동지들을 모으던 와중에 윤 선생의 음악적 재능에 관한 소문을 들은 거죠. 평소 윤 선생은 조선의 미래인 아이들을 위한 노래가 없다는 사실을 안타깝게 여겼기에 방 선생의 제안을 수락했어요. 이후 아이들이 마음 놓고 우리말로 된 노래를 부르도록 동요를 창작하기 시작했죠. 1924년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요인 '설날'과 대표곡 '반달'이 세상에 나왔어요. 어린이날을 기념한 '어린이날' 역시 그가 작곡한 동요예요."(안)

소년중앙 - 윤극영 가옥 취재

소년중앙 - 윤극영 가옥 취재

많은 사람이 어린이날 하면 방 선생만 떠올리는데요. 사실 어린이날은 1923년 발족한 한국 최초의 어린이 문화운동 단체 색동회가 주축이 돼 탄생했답니다. 어린이 교육과 문화 활동을 위해 설립된 색동회는 방 선생을 주축으로 한 일본 유학생 모임에서 시작됐는데요. 윤 선생은 음악 부문을 맡아 색동회의 일원으로 활동했죠. '오월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이라는 가사로 잘 알려진 '어린이날' 역시 색동회 활동을 하면서 만들었어요. 흔히 독립운동가 하면 무력 항거나 시위에 나섰던 분들을 떠올리지만 조국을 잃은 아이들이 일제 치하에서 우리 말과 글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 문화운동을 펼친 색동회도 마찬가지죠. 당시는 이름마저 일본식으로 변경해야 했던 엄혹한 시절이었기에, 사용이 금지된 조선어로 된 노래를 만든다는 건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어요. "예를 들어 '반달'은 일제강점기 중반에 해당하는 1924년 탄생했죠. 윤 선생은 '반달'을 학교 선생님들에게 몰래몰래 퍼뜨렸고, 삽시간에 팔도방방곡곡으로 퍼져 골목에서 조선의 아이들이 부르곤 했어요. 이를 본 조선총독부가 '이 노래를 만든 자를 찾아내라'고 해서 전국 수배령이 내려지기도 했죠."(안)

 윤극영 가옥을 찾아 그의 일생에 대해 배우고, 직접 노래도 불러본 이서정(왼쪽) 학생모델과 김나윤 학생기자.

윤극영 가옥을 찾아 그의 일생에 대해 배우고, 직접 노래도 불러본 이서정(왼쪽) 학생모델과 김나윤 학생기자.

"그래서 윤 선생님을 '반달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건가요?" 나윤 학생기자가 질문했어요. "거기에는 윤 선생의 어린이를 향한 깊은 애정이 담겨 있어요. 옛날에는 이름 앞에 호(號)를 붙이곤 했어요. 호는 본명이나 자 이외에 쓰는 이름으로, 허물없이 쓰기 위해 지었죠. 방 선생의 경우 소파가 호에 해당하죠. 하지만 윤 선생은 평소 '나를 어른 어린이라 불러 달라'고 할 정도로 어린이 사랑이 남다른 분이라 일부러 호를 짓지 않았어요. 대신 '반달 할아버지'란 애칭으로 불리죠." 안 활동 간사의 설명을 듣고 나니 윤 선생의 손길이 묻은 소품들이 더욱 의미 있게 느껴지네요.

생전에 남긴 메모와 악보를 통해 윤극영 선생의 창작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생전에 남긴 메모와 악보를 통해 윤극영 선생의 창작 과정을 엿볼 수 있다.

거실 역시 윤 선생과 관련 물품이 전시돼 있습니다. 앞서 언급된 색동회를 기념하는 배지와 색동회 회보는 물론 그의 창작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친필 원고와 악보들도 볼 수 있었죠. 세로로 써 내려간 원고지에는 펜으로 줄을 그어 가사를 수정한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답니다. 또 곳곳에 있는 액자에는 윤 선생이 만든 동요 가사가 친필로 적혀있어요. 그의 대표곡 '반달'과 '설날'의 가사도 보이네요. "동요란 어린이를 위해 동심(童心)을 바탕으로 지은 노래를 뜻해요. 지금이야 당연하게 부르고 즐기지만, 사실 우리나라 창작동요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일제강점기였던 1920년대까지만 해도 어린이는 어른들과 함께 서양 악곡의 형식을 빌려 지은 간단한 노래인 창가(唱歌)나 일본어로 된 노래를 불렀죠. 즉, 우리나라 어린이를 위한 노래는 없었습니다. 윤 선생은 한국 어린이의 감정과 정서에 맞는 노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동요를 작사·작곡하고, 어린이들이 우리의 말과 글을 잊지 않게 하려고 평생을 바쳤어요. '설날'은 우리나라 동요의 효시가 되는 작품이에요."(안)

전시실에 있는 풍금으로 윤극영 선생의 곡 '고기잡이'를 연주해본 이서정(오른쪽) 학생모델과 김나윤 학생기자. 실제 윤 선생은 피아노를 사용해 작곡했다.

전시실에 있는 풍금으로 윤극영 선생의 곡 '고기잡이'를 연주해본 이서정(오른쪽) 학생모델과 김나윤 학생기자. 실제 윤 선생은 피아노를 사용해 작곡했다.

"저희도 알고 있는 노래들이네요. 그런데 윤 선생님이 만든 곡인 줄은 몰랐어요." 벽면에 걸린 노랫말을 찬찬히 읽던 소중 학생기자단이 놀라워했죠.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갈가나 / 고기를 잡으러 강으로 갈가나 / 이 병에 가득히 넣어가지고서 / 라라라라 라라라라 온다나~♪ 이 노래는 들어본 적 있나요?"(안) "학교에서 배웠어요."(이) "맞아요. 초등학교 3학년이 배우는 '고기잡이'라는 곡이에요. 윤 선생님이 만든 노래 중 현재 유일하게 교과서에 수록된 곡이죠."

거실 반대편 방에는 피아노처럼 생긴 악기가 있었어요. 이 악기의 이름은 풍금입니다. 발로 페달을 누르면 바람이 들어가 소리를 내는 건반 악기예요. 윤극영 가옥에선 윤 선생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동요회, 시 낭송, 동요구연회 등 어린이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요. 소중 학생기자단은 윤극영 가옥 동요 교실 지도 강사인 이경희 동요단장, 심상분 선생님과 함께 윤 선생의 대표곡을 불러보기로 했죠.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 먼저 8분의 6박자 반주에 맞춰 '반달'을 합창했습니다. "친구랑 '쎄쎄쎄' 하면서 부르던 곡이네요!" 노래를 마친 나윤 학생기자가 반갑다는 듯이 말했어요. "어, 그러네요."(이) "맞아요. 여러분에게 익숙할 거예요. 어떤 친구들은 '푸른 하늘'을 제목으로 착각하기도 하더라고요. 하하."(이 단장)

 이경희 동요단장의 풍금 반주에 맞춰 심상분(왼쪽에서 둘째) 선생님과 함께 '반달' '어린이날'을 합창한 소중 학생기자단.

이경희 동요단장의 풍금 반주에 맞춰 심상분(왼쪽에서 둘째) 선생님과 함께 '반달' '어린이날'을 합창한 소중 학생기자단.

다가오는 어린이날을 기념해 '어린이날' 합창이 이어졌습니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이 단장의 기운찬 풍금 반주를 타고 나윤 학생기자와 서정 학생모델의 목소리도 높아져만 갑니다. 신명 나게 2절까지 노래를 마치니 절로 박수가 나오네요. 직접 불러보니 곡에 담긴 어린이를 향한 윤 선생의 애정이 더욱더 생생하게 다가왔어요. 소중 친구들도 어린이날을 맞아 동요 한 소절 불러보는 건 어떨까요. 멜로디와 가사 하나하나에 여러분을 생각하는 마음이 듬뿍 담긴 노래랍니다.

글=성선해 기자 sung.sunhae@joongang.co.kr, 사진=임익순(오픈스튜디오), 동행취재=김나윤(서울 구룡초 5) 학생기자·이서정(서울 언북초 5) 학생모델

학생기자단 취재 후기

이번 취재를 준비하느라 윤극영 선생에 대한 자료를 찾아봤어요. '반달' '설날' '어린이날' 등 제가 평소 알던 노래가 윤 선생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죠. 평소 학교 음악 시간 외에는 동요를 부를 기회가 거의 없어서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OST를 즐겨 들어요.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조선 아이들이 우리의 말과 글을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동요를 만든 윤 선생의 일생에 대해 듣고 나니 저도 자주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나윤(서울 구룡초 5) 학생기자

평소 저는 동요보다는 가요를 많이 들어요. 그런데 오늘 윤극영 가옥에서 들은 노래들이 대부분 익숙해서 놀랐어요. 이번 취재를 통해 어린이를 위해 평생을 바친 윤 선생의 일생에 대해 알게 됐어요. 특히 일제강점기에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방정환 선생의 제안을 수락해 색동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전시실에 있는 유품 중 윤 선생의 아름다운 친필이 있는 액자와 병풍이 기억에 남아요. 소중 친구들도 윤극영 가옥을 방문해 윤 선생에 대해 알게 됐으면 좋겠어요.

이서정(서울 언북초 5) 학생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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