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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민우의 시선

권력자의 시치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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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최민우 기자 중앙일보 정치부장

대통령 모욕죄로 시끄럽다. 2년 전 문재인 대통령을 비난하는 내용의 유인물을 살포한 30대 남성 김 모 씨가 모욕죄 혐의로 최근 검찰에 송치돼서다. 모욕죄는 형법상 친고죄이기에 피해자(대통령)의 고소 의사가 있어야 한다. “대통령을 모욕하는 정도는 표현의 범주로 허용해도 된다. 대통령 욕해서 기분 풀리면 그것도 좋은 일”이라고 했던 문 대통령 예전 발언이 새삼 조명되면서 논란은 더 증폭되고 있다.

모욕죄로 고소하면서 숨긴 건 #비난을 피하려 했던 이중잣대 #결정 않는 리더십, 혼란 자초

JTBC '썰전'

JTBC '썰전'

김 씨가 뿌린 유인물에는 “북조선의 개, 한국 대통령 문재인의 새빨간 정체”라는 문구가 있었다. ‘북조선의 개’라는 표현은 듣기에 따라 충분히 불쾌할 수 있다. (북한은 이보다 더한 저주를 문 대통령에게 퍼붓지만, 모욕죄는 주관적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지난달 29일 “전단 내용이 아주 극악해 당시에 묵과하고 넘어갈 수 없는 수준이라는 분위기가 강했다”고 했다. 문 대통령도 대통령이기에 앞서 인간이자 시민이다. 그래서 본인이 ‘인간으로서 존엄을 침해받았다’고 여겨 모욕죄로 고소하는 건 그럴 수 있다. 그렇다면 떳떳해야 한다. 고소한 사실을 밝히고 왜 그랬는가를 말하면 된다. 그게 투명한 사회요, 민주적 리더십이다. 비록 시비는 붙겠지만 논쟁을 통해 합의를 도출하는 게 민주주의 아닌가. 하지만 문 대통령은 그걸 숨겼다. 사건 당사자인 김 씨가 수차례 경찰 조사를 받으며 물어도 경찰은 “누가 고소했는지 공개할 수 없다”고 했다. 논란이 커지자 청와대가 뒤늦게 고소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왜 숨겼을까. 일반인에 대한 대통령 고소가 불러올 후폭풍을 익히 짐작했던 거다. 그 논란이 부담스럽다면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데 고소는 하면서 그게 외부로 노출되는 건 최소화하려 했다. 시민으로서 갖는 권리는 챙기면서 권력자로 받게 될 비난은 피하고 싶었던 거다. 전형적인 이중잣대요, ‘놀부 심보’다.

최근 청와대 5인 만찬 논란도 그렇다. 대통령 입장에서는 떠나는 청와대 참모 중 누구는 넣고 누구는 제외하기 난감했을 터다. 그래서 지난달 19일 4명 다 불러서 만찬을 했는데 그게 5인 이상 집합 금지를 위반한 셈이 됐다. “국민들 일상의 불편함이 큰데, 제가 그만 인정에 끌려 방역지침을 어기고 말았다. 미욱한 탓이다. 주의하겠다”라며 쿨하게 인정했으면 별일 아니었을 게다. 누구나 실수한다. 대통령은 신이 아니다. 하지만 여권은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식이다. 결국 중수본이 나서서 “대통령의 업무수행을 위한 의견수렴, 당부사항 전달 등은 사적 모임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방어막을 쳐주었다. 대통령 보호를 위해 방역당국까지 등장하는 게 과연 정상인가.

文 대통령 사저 부지(경호처 포함).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文 대통령 사저 부지(경호처 포함).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양산 사저 논란도 비슷했다. ‘경호부지까지 마련하다 보니 불가피하게 농지도 포함됐다. 농지법이 이렇게 엄격한지 몰랐다’며 이해를 구해야 했다. 청와대도 밝혔듯 이 사저로 재산상 이득을 취하는 것도 아니지 않나. 하지만 청와대는 전직 비서실장, 국정상황실장까지 나서서 “병적 수준” “노무현 봉하 사저를 아방궁이라고 난리쳤던 분들 자중하라”며 도리어 호통을 쳤다. 문 대통령도 페이스북에 “그만하시지요, 좀스럽고 민망한 일”이라고 했다.

왜 이럴까. 대통령은 일반 국민과 다르다는 특권 의식이다. 겉으로는 보통의 민주 시민과 동등한 것처럼 행동하면서 뒤로는 법을 좀 어겨도, 편법을 써도, 국가 기관을 동원해도 ‘통치행위이니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다. 어찌보면 조선시대 왕처럼 여전히 봉건시대 군주제에 머물러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3월 12일 야당이 경남 양산 사저 부지를 두고 각종 의혹을 제기하는 것에 대해 "좀스럽고 민망한 일"이라며 "선거시기라 이해하지만, 그 정도 하시지요"라고 비판했다. [문 대통령 트위터 캡처.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은 3월 12일 야당이 경남 양산 사저 부지를 두고 각종 의혹을 제기하는 것에 대해 "좀스럽고 민망한 일"이라며 "선거시기라 이해하지만, 그 정도 하시지요"라고 비판했다. [문 대통령 트위터 캡처. 연합뉴스]

근본적으론 책임지지 않는 거다. 문 대통령은 쟁점이 큰 사안일수록 명확히 결정하기보다는 눙치고 미루는 경우가 많았다. 선택은 곧 책임이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한국 정부는 코로나 대처와 관련해 지난해 백신 도입보다는 치료제와 방역 강화로 방향을 잡았다. 지금이야 결과론적으로 떠들지만 치료제-방역 강화가 코로나를 잡을 수도 있었다. 인간은 완전무결하지 않다. 누구나 오류를 범한다. 대신 고치면 된다. "코로나가 약화돼 방역 강화만으로 종식시킬 것이라 생각했다. 판단 미스였다. 지금이라도 백신 확보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국민을 설득해야 했다. 근데 선택을 안 하고 나는 상관없다는 듯 시치미를 떠니 수정할 일도, 사과할 일도 없게 된다. 그러니 “백신 문제를 지나치게 정치화하여 불안감을 부추기지 말라”와 같은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거다.

다시 모욕죄 얘기다. 동·서독 통일을 이끈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는 190㎝가 넘는 키에 체중이 많이 나가고 말이 어눌해 놀림을 많이 당했다. ‘머리가 비었고 좀 멍청한 총리’라는 톤의 유머집까지 발간됐다. 기자가 “명예훼손이나 모욕죄 아니냐”고 물었더니 콜의 대답은 이랬다. "아니다. 국가기밀누설죄다." 이런 유머를 바라는 건 아직 한국에선 사치다.

최민우 정치에디터 choi.minwoo@joongang.co.kr

최민우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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