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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깨어질 약속…3000만명 희생 전쟁 못 막았다 [Focus 인사이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폴란드를 분할 점령한 후 환담 중인 독일과 소련의 장교. 불과 2년 후 이들은 사상 최대의 전쟁을 벌이는 사이가 되었다. [wikipedia.org]

폴란드를 분할 점령한 후 환담 중인 독일과 소련의 장교. 불과 2년 후 이들은 사상 최대의 전쟁을 벌이는 사이가 되었다. [wikipedia.org]

물과 기름 같은 독일과 소련이 한배를 탔다는 뉴스에 전 세계가 경악했다.

독일과 소련 일촉즉발 위기 앞 #불가침 조약으로 한 발 물러서 #조약 2년 못 지나 전쟁에 돌입

1930년대가 되자 유럽에서 대규모 전쟁이 벌어진다면 독일과 소련이 주인공일 것이라고 모두가 생각했을 만큼 두 나라는 극도로 증오하는 관계였다. 독일 나치 정권은 공산주의를 경멸했고, 소련은 자본주의 세계 타도의 선봉에서 호시탐탐 세력 확장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1939년 8월 23일, 모스크바에서 독일 아돌프 히틀러와 소련 이시오프 스탈린의 대리인 요하임 리벤트로프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독소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는 놀라운 소식이 타전됐다.

▶조약 체결국은 상대방을 공격하지 않는다.

▶조약 체결국의 한쪽이 제3국의 공격을 받으면 상대방 조약 체결국은 조약을 체결한 나라를 공격한 제3국을 일절 원조하지 않는다.

▶조약 체결국 쌍방은 상대를 적대하는 단체에 가입하지 않는다.

▶조약 체결국 사이에 생긴 분쟁은 평화적으로 해결한다.

1977년 11월 19일,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가 전격적으로 이스라엘을 방문하면서 중동에서 극적으로 대화의 물꼬가 트인 것처럼 적대국들이 사이좋게 지내기로 했다면 상식적으로 긍정적인 상황이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독일과 소련의 화친은 오히려 전쟁이 바로 코앞에 다가왔음을 모두가 느끼도록 만들어 주었다.

독소불가침 조약 체결을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한 독일 외상 리벤트로프를 맞이하는 소련 외상 몰로토프. [wikipedia.org]

독소불가침 조약 체결을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한 독일 외상 리벤트로프를 맞이하는 소련 외상 몰로토프. [wikipedia.org]

일단 불가침 조약으로 독일과 소련의 전쟁 가능성은 사라졌지만 대신 다른 전쟁이 목전에 다가온 것이었다. 이런 이상한 모습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새롭게 재편된 유럽의 정세 때문이다.

패전 후 독일은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워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처럼 갈가리 해체당하는 최악의 경우를 면했지만 상당한 영토를 상실했다. 그리고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소련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을 타도하고 수립된 소련은 전쟁 중 단독 강화를 맺어 전선에서 이탈했기에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 승전국 대접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따라 많은 영토를 상실했다.

그런데 1919년 독립한 폴란드가 소련과 독일이 상실했던 영토 사이에 위치했다. 이 때문에 독일과 소련은 대립과 별개로 모두 폴란드와 적대적이었다.

제1차세계대전 후 유럽 지도의 모습. 옛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사이에 많은 신생국이 등장했다. 이중 폴란드는 독일, 소련 모두 반드시 회복할 고토로 여겼다. [wikipedia.org]

제1차세계대전 후 유럽 지도의 모습. 옛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사이에 많은 신생국이 등장했다. 이중 폴란드는 독일, 소련 모두 반드시 회복할 고토로 여겼다. [wikipedia.org]

히틀러는 수시로 단치히와 폴란드 회랑의 반환을 주장하며 침략 의지를 드러냈다. 1920년대에 영토를 놓고 전쟁까지 치른 소련도 폴란드를 적대시했다. 따라서 어느 한쪽이 폴란드를 침공한다면 다른 쪽에서 순순히 차지하도록 방치하지 않을 것은 명약관화했다.

게다가 폴란드는 프랑스·영국과 동맹이었다. 서방과 소련의 사이도 적대적이지만 만일 프랑스·영국·소련이 힘을 합해 동시에 전쟁을 벌이는 것은 독일의 악몽이었다.

마치 냉전 시대에 핵에 의한 벼랑 끝 평화처럼 독일과 소련의 전쟁을 근근이 막고 있던 이러한 모습이 독소불가침 조약으로 일거에 무력화된 것이다. 당연히 폴란드에는 위기였다.

프랑스·영국이 변수였지만 히틀러는 이들은 겁쟁이라서 정작 행동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독일은 핀란드·발트 3국·동부 폴란드에 대한 소련의 권리를 인정한 대가로 마음 놓고 원하던 전쟁을 벌일 수 있었다.

1939년 1월 30일, 의회에서 연설 중인 히틀러. 이때 폴란드를 침략하겠다는 의지를 밝혔고 소련에 대한 증오심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wikipedia.org]

1939년 1월 30일, 의회에서 연설 중인 히틀러. 이때 폴란드를 침략하겠다는 의지를 밝혔고 소련에 대한 증오심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wikipedia.org]

그리고 모두의 예상대로 조약이 맺어진 지 불과 1주일 후인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하고 곧이어 밀약대로 소련이 동쪽에서 폴란드를 협공했다. 당시에는 국지전처럼 보였지만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었다.

고립무원 상황에서 폴란드는 항전했으나, 결국 1개월 만에 지구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독일도 소련도 그리고 제삼자 모두가 이러한 독일과 소련의 밀월 관계가 오래가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소련 지배에 대한 히틀러의 의지가 바뀐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폴란드의 분할도 그랬고 이후에 벌어진 서부전선의 전격전도 결국은 독일이 소련과의 일전을 염두에 둔 준비 과정이었을 뿐이었다.

당연히 소련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이이제이’처럼 서유럽이 독일 때문에 크게 혼란을 겪으면 공산화하는데 유리할 것이라 판단했다. 결론적으로 독일과 소련의 평화는 영원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당사자들도 1939년 체결한 밀약의 유효기간은 잠시뿐이라고 예측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불과 2년 후에 최초 추산으로도 3000만 명이 전쟁의 폭풍 속에 죽어간 독소전쟁이 시작되었다.

화친의 진정한 목적이 평화가 아니라 더 큰 전쟁을 위한 것이었다면 조약문은 애초부터 휴짓조각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처럼 국제관계는 문서보다 힘의 논리와 이익이 먼저 작용한다. 이는 현재 진행 중인 현실이고 교훈이다.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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