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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역사 대신 신화에 집착하는 정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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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4호 31면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승리자 역사 부정하기만 몰두 #남은 1년도 나올 생각 안 해 #신화는 무능력한 좌파들 작품 #실력 키워 당당한 역사 만들라

소설가 이병주가 대하소설 『산하』의 서문으로 쓴 게 딱 이 한마디였다. 오늘날까지 인구에 회자되는 명언이지만, 요즘처럼 이 말을 다시 생각게 하는 때도 많지 않을 듯하다. 이 정부가 약속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라는 신화의 끝이 과연 어디인지 답이 나오지 않는 까닭이다.

이병주는 신화에 더 관심이 있었다. 장석주 시인의 평가대로 “그는 작가란 햇빛에 바래진 역사를 새로 쓰는 복원자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역사란 승자들의 기록인 만큼 결과만 따지게 되지만, 작가로서 그는 무명의 패배자에게도 발언권을 주고 결과 아닌 동기에 달빛이라도 비추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게 일반적일진대, 이 정부는 좀 이상하다. 승리자이면서도 역사 대신 신화를 추구해왔다. 승리의 첫날부터 자기 역사를 써내려갈 생각보다, 과거 승리자들의 역사를 부정하는 데 몰두했다. 뿌리 깊은 피해의식의 발로인지 몰라도 과거 패배자들의 젖은 몸을 달빛에 쬐어 말리는 데 급급했다.

이 정부는 그렇게 임기의 절반을 이른바 ‘적폐 청산’으로 다 보내고, 나머지 기간에는 스스로 적폐가 되어갔다. 적폐 청산이란 폐단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나부터 안 하면 절로 이뤄지는 것인데, 음침한 달빛 아래서는 그런 진리가 보일 리 없었던 거다.

이들이 남길 만한 역사가 하나도 없는 이유도 다른 게 아니다. 뭔가를 해보려면 밝은 햇빛 속으로 나와 당당하게 겨뤄야 할 텐데, 잘못을 가려주는 어둠 속에서 무오류만 외치며 상대를 타도 대상으로 대하고 있으니 이룰 게 없고 이룬 것도 없는 것이다.

선데이칼럼 5/1

선데이칼럼 5/1

남은 1년 역시 나올 생각이 없어 보이는 게 더 안타깝다. 지방선거의 패배로 뭔가 깨닫길 바랐지만, 신화의 자력은 너무도 강력했다. 미래를 걱정하는 합리적인 목소리들은 여전히 그늘 밑에서 음험한 입을 놀리는 자들의 목소리에 묻히고 만다. 대통령을 위해 월광 소나타를 연주하며 낯 뜨겁게 구애하던 인물(그것도 국민대표인 국회의원이)을 대통령 대변인으로 삼은 건 어쩌면 필연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병든 신화는 계속된다. 여당의 원내대표라는 사람이 순국선열과 성추행 피해자들을 구분하지 못하는 건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다. 불순한 의도 말고는 달리 생각할 도리가 없다. 순국선열과 국민, 피해자를 한꺼번에 불러놓고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면 뭘 사과한다는 건지 어찌 알겠나. 게다가 성추행 피해자라고 못 박지도 않는다. ‘피해 호소인’으로 넘어가려던 사고체계에서 여전히 한 발짝도 걸어 나오지 않은 것이다.

청와대가 신설한 방역기획관 자리에 굳이 백신 늦장 도입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을 임명한 것도 비정상이다. 음모론 대가가 진행하는 대표적인 편파방송에 수십 차례나 출연해 백신 도입을 서두를 필요 없다고 열변을 토했던 전문가다. 그 결과는 누구나 안다. 방역 모범국이던 우리나라는 외신으로부터 ‘백신 굼벵이’라고 조롱받는 처지가 됐다. 전체 국민 접종률이 한 자릿수를 벗어나지 못해 대상 목표 대비 접종률만 발표해야 하는 질병관리청이 딱할 뿐이다.

이런 인사를 하는 대통령이니 방역수칙을 어기고 퇴임 참모들과 5인 술판을 벌이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올해 집단면역은 사실상 물 건너가고, 사회적 거리두기 연장으로 국민 고통이 배가되는 상황에서 방역수칙 위반자에 대한 무관용을 외치던 대통령이었지만 말이다. 5인 회식은 안 되고 5인 만찬은 가능하다고 변명해야 하는 중수본만 모양이 빠졌을 따름이다.

형사 피의자가 검찰총장 후보자가 되고, 법무장관이 검찰총장 자격으로 “대통령 국정철학과의 상관성”을 공공연히 피력하는 것도 이들의 신화 속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북한이 서해에서 해안포 사격을 해도, 비무장지대 감시초소(GP)의 총격을 가해도 “절제된 방향으로 시행된 사소한 위반”일 뿐인 외무장관도 그들의 신화를 생각하면 분노할 일도 아니다. 사법부를 정치권 눈치나 보는 집단으로 전락시켜놓고 직을 걸 만한 일은 아니라는 대법원장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이런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모습들이 모두 자기들만의 신화에만 빠져있는 까닭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미국의 문명사학자 윌 듀런트는 『문명 이야기』에서 “신화는 무능력한 남편들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신화들이 하나같이 악의 뿌리로 여자를 지목하고 있는 까닭이다. 우리는 이렇게 바꿔 말할 수 있겠다. 이 정부의 신화는 무능력한 좌파들의 작품이라고. 우파를 그야말로 악의 뿌리로 여기니 말이다.

이 말도 덧붙여야 하겠다. 이제 달빛 물든 신화 밖으로 걸어 나오라고. 그것이 옳지 않았음을 인정하고, 햇빛 가득한 양지에서 내 잘못된 부분을 살펴보라고. 남 탓하지 말고 내 실력 키워서 당당히 역사를 만들어가라고. 그러려면 우파를 악의 뿌리가 아닌, 내 부족함을 채워줄 동반자라고 여겨야 한다고.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무능과 오만이 이 나라 국민이 원하는 모습은 아니라고. 그것을 다시 고집한다면 이번엔 국민이 그냥 넘기지 않을 거라고.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대기자/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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