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공연 때 MC가 “고향 봤나?”…“깜빡 졸아” 답해 웃음꽃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734호 16면

[조영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예스터데이 〈10〉 두 고향

2003년 평양의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음악회에서 함께 노래하는 조영남씨와 바리톤 김동규씨. 황해도 남천에서 태어난 조영남씨의 사정을 고려한 듯 고향을 그리워하는 내용의 가곡 ‘향수’를 불렀다. 당시 통일음악회는 체육관 개관을 기념해 열렸다. [SBS 방송 캡처]

2003년 평양의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음악회에서 함께 노래하는 조영남씨와 바리톤 김동규씨. 황해도 남천에서 태어난 조영남씨의 사정을 고려한 듯 고향을 그리워하는 내용의 가곡 ‘향수’를 불렀다. 당시 통일음악회는 체육관 개관을 기념해 열렸다. [SBS 방송 캡처]

나는 지금 이 글을 잘 써야 한다. 내 나이 때문에 이 글이 내 자전적 얘기의 끝 편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황해도서 태어나 1·4 후퇴 때 피난 #말 한 필, 개와 함께 걸어 내려와 #‘살다 정든 곳’ 충청도가 제2고향 #선친은 중풍으로 10년 넘게 병석에 #가짜 꿀 판매 세입자 도운 권사 모친 #“안 그럼 방세 안 나오는 걸 어카간”

나는 1944년 황해도 남천에서 태어난 것으로 주민등록증에 적혀 있다. 그러나 나한텐 또 하나의 생년월일이 있으니 그건 내가 1944년이 아니라 해방이 되던 1945년에 태어났다는 설이다.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황해도 남천이라는 곳에서 살던 우리 식구는 6·25 전쟁이 터지고 소위 1·4 후퇴 때 식구들 모두가 탈북에 성공, 38 이남인 충청남도에 안착했기 때문이다.

아이고! 우리 양친 부모가 조금만 굼떴더라면 우리는 모두 북한에 남아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치하에서 살 뻔했다. 그건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나처럼 번잡스런 인물이 이북에서 살았다면 아! 생각만 해도 진땀 난다.

어쨌거나 상왕우왕(우왕좌왕의 패러디)하면서 우스꽝스럽게도 나는 두 개의 고향(황해도와 충청도)이 생겨났던 것이고 생년월일도 두 개(1944년과 1945년)가 만들어진 것이다. 내가 오래전에 만든 고향에 관한 노래 ‘내 고향 충청도’도 처음엔 이렇게 나간다.

‘일사후퇴 때 피난 내려와 살다 정든 곳 두메나 산골 태어난 곳은 아니었지만 나를 키워준 고향 충청도.’

분명히 시작부터 ‘일사후퇴’ 얘기도 쓰고 ‘태어난 곳은 아니었지만’이라는 설명에 ‘나를 키워준 고향 충청도’, 이렇게 썼고 사람들이 이 노래를 골백번씩 들었을 텐데도 한사코 조영남 고향은 충청도라고 그런다.

어릴 적 어떻게 피난 왔는지 기억 안 나

나는 사실 어머니 김정신 권사님한테 어째서 나에 관한 생년월일이 남편 조승초씨와 다를 수가 있느냐 하며 DNA 검사라도 시행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때는 그런 기술도 없었기 때문에 누나, 형, 그리고 오랫동안 부산대 음악교수였던 동생 조영수 교수도 아무 검증절차 없이 그냥 형제, 동생이려니 하고 살아왔다. 이건 좀 다른 얘기지만 나는 대학교수를 못한 게 얼마나 다행인 줄 모른다. 왜냐면 내 동생은 독일서 정통 성악공부를 하고 돌아와 부산음대에서 20년 넘게 교수생활을 해왔지만 사람들은 내 동생을 ‘조 교수’라고 부르는 걸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라고 별수 있었겠는가!

나는 초등학교 때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10년 넘게 병석에만 누워 계셨던 아버지보다 웃기는 소리를 잘하셨던 김정신 권사님 쪽 성격을 더 많이 물려받은 것 같다.

동생 조 교수가 들려준 얘긴데 영수나 내가 방학이 되어 책가방을 마루 한쪽에 놔두면 방학이 끝나는 날까지 책가방에 손을 안 대어 먼지가 뽀얗게 끼곤 했다는 것이다. 우리 엄마는 얘들이 공부를 하건 말건 일절 신경을 안 썼다는 얘기다. 아버지가 병석에 들자 김정신 권사님은 앉은뱅이 싱거 재봉틀로 살림을 꾸려 나갔는데 어떤 때 보면 권사님은 재봉틀 코너에 머리를 기대고 시도 때도 없이 처절하게 잠에 빠지시는 거다. 침과 콧물이 방바닥에 흥건히 젖을 정도로 말이다. 내가 엄마 등을 탁! 치며 소리친다. “엄마, 차라리 누워서 주무시구려!” 하면 엄마가 활짝 깨어나며 하시는 말씀! “아이고 잠이 와야 잠을 자지.”

나는 그때 우리 엄마가 세계에서 가장 거짓말 잘하는 예배당 권사님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김정신 권사님은 디귿(ㄷ)자 집에서 왼쪽 날개 부분을 옥자네한테 팔았고 이어서 안쪽 날개 부분 부엌과 아궁이가 딸린 방 한 칸을 젊은 부부에게 세를 줬다. 아버지는 그 집 아저씨를 사이상(최씨)이라 일본식으로 불렀다. 사이상 부부는 가짜 꿀을 만들어 오가는 기차에 팔아넘기는 정말 전문가였다.

그때 우리는 그게 가짜 꿀인줄 정말 몰랐다. 꿀을 그렇게 만드는 줄만 알았다. 가짜 꿀을 만들려면 우선 조청 같은 엿을 만들어야 한다. 엿을 만들기 위해선 한나절 불을 때야만 하고 뜨거운 엿국물을 만들기 위해 계속 큰 주걱 같은 기구로 저어 줘야만 한다. 연탄도 없던 시절이다. 우리 어머니 김정신 권사님은 남편 병수발이나 새벽기도를 다녀오면 건넌방 사이상 아주머니네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 가짜 꿀 만드는 일을 도와주시는 거다. 맨날 똑같은 방법으로 국자를 저으시며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신령스럽게 찬송가를 부르시며 틈틈이 “주여 주여” 하면서 가짜 꿀을 만드신다. 내가 서울 올라와 적어도 교회 권사님은 가짜 꿀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물은 적이 있다.

조영남씨와 동생 조영수씨. [중앙포토]

조영남씨와 동생 조영수씨. [중앙포토]

“아니 엄마는 삽다리 감리교회 대표 권사님이 어떻게 10년 이상이나 가짜 꿀을 만들었대요?”

김 권사님은 숨도 안 쉬고 대답했다.

“안 그럼 방세가 안 나오는 걸 어카간?”

나는 하나님이 방세를 받아내기 위해 가짜 꿀 만든 걸 충분히 이해하셨으리라 지금도 믿고 있다.

돌아가신 큰 누나가 낄낄거리며 나한테 들려준 얘기가 또 있다.

황해도에서 남쪽으로 피난 내려올 때 운이 좋게 개성쯤에서 우리 부모 팀은 우리 식구 큰 누나, 작은 누나, 형, 나를 기차에 태우고 “자! 그럼 서울 성북동 작은아버지 집에서 만나자”, 그리고 아버지는 기차에서 내리시더란다. 우리 어머니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여기 보세요 여러분! 우리 영감탱이가 식구들을 기차에 태우고 자기는 걸어서 간다고 저렇게 떠나간대요” 하다가 엄마도 내 동생 영수를 업고 “여보, 나도 같이 가요” 하며 따라나서더란다. 아버지는 피난길 도중에 어떤 사람이 말 한 필을 주어 같이 내려오던 큰 개 한 마리를 못 버리고 말과 개와 함께 걸어서 탈북을 했다 한다. 일찍부터 이산가족이 됐던 거다.

여기까지는 큰 누나와 형이 들려줘서 아는 얘기고 다음 얘기는 김 권사님의 얘기인데, 1·4 후퇴 추운 겨울 무슨 강을 건너는데(임진강쯤이었을 거다) 추위는 고사하고 물살이 워낙 세서 사방에 사람 시체가 둥둥 떠내려가는데, 말과 개 고삐를 쥔 아버지 덕분에 무사히 강을 건너고, 물을 건널 땐 옷들을 머리에 이고 건너왔기 때문에 추위에 떨면서 강을 건너자 이쪽 남쪽에서 군인들이 불을 피워놓고 빨리 와서 몸을 녹이라고 하더란다.

내 동생 영수는 나보다 몸집이 튼실하다. 나는 그런 때에 “내 동생 영수는 피난 내려올 때 엄마 등에 업혀 임진강 물을 너무 많이 마셔 아직 배가 부른 겁니다” 하고 놀려대곤 한다.

나는 기억력이 워낙 부실해서 피난을 왜 내려왔는지 왜 아버지가 개와 말을 끌고 왔는지, 기차에서 내려 무슨 수로 큰 누나가 실력을 발휘해 트럭을 어떻게 타고 왔는지 통 알 수가 없다. 도무지 생각이 안 나는 걸 낸들 뭐 어쩌겠는가.

믿거나 말거나 10여 년 전 나는 대한민국 경축 연예인단 일원으로 평양엘 다녀온 적이 있다. 집에 와서 내가 평양 공연을 간다고 했더니 큰 누나와 형은 잘 됐다고 하면서 평양 가는 길에 황해도 남천을 지나가게 되니 고향을 잘 보고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분명 다섯 살, 여섯 살 때까진 거기 살았음이 틀림없는데 도무지 북쪽 고향에 대해선 생각나는 것이 손톱만큼도 안 남아 있었는데, 마침 이번 평양 방문은 강변북로를 따라 버스를 타고 가 휴전선 너머부터는 북쪽 버스를 타고 평양까지 갔다가 오는 역사상 초유의 방북길이었고,                이번에야말로 내 고향 남천을 반드시 둘러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반드시 남천을 거쳐야 평양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바퀴 달린 신발에 평양 시민 놀랐을 듯

출발 전부터 난리가 났다. 들떴다는 얘기다. 이번에야말로 내 두 눈으로 내 고향이 어떻게 생겼는지 돌아보게 되었으니 나는 야무진 계획을 세웠다. ‘남천을 지나갈 때 여기가 내 고향이다. 잠시 둘러보겠다. 사진도 찍고 그럴 거다.’

휴전선 근처에서 큰길 건너 북쪽으로 들어서면서 모든 일은 내 생각과는 다르게 흘렀다. 북쪽 버스를 타기 전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펑퍼짐한 언덕 위에 허리를 감출 수 있을 만한 높이로 흰색 광목천이 삥 둘러쳐졌는데 그게 화장실이었다. 삽으로 웅덩이를 적당히 파내고 그 위에 긴 나무 판때기를 얹은 것이 전부였다. 버스로 달리는데 우리와는 너무도 다른 것이 도무지 지나다니는 차가 거의 없었다. 차가 지나가도 군인 트럭이 전부였다. 북쪽 산들은 나무가 없어 온통 민대머리 산이었고, 모든 형편은 내 생각보다 너무 심각하다 싶었는데 벌써 평양에 도착한 것이다.

공연 당일 그쪽 MC가 물었다.

“조영남씨의 고향은 황해도 남천이라면서요?”

나는 “네, 그렇습니다”, 했다.

“그런데 고향을 보고 오셨습니까?”

“아니요, 못 봤습니다.”

“왜 못 보셨나요?”

“제가 깜빡 졸아서 못 봤습니다.”

그때서야 덤덤하던 관객이 막 웃어주었다. 나는 특별히 남긴 건 없다. 그러나 그때 바퀴 달린 운동화를 신고 있었는데 퇴장하면서 쭉 밀면서 퇴장했다. 평양 시민들은 깜짝 놀랐으리라. 내가 무대를 얼음판처럼 미끄러져 내려갔으니 말이다. 지금부터 가상질문.

“그럼 돌아오는 길에는 고향 남천을 둘러 봤습니까?”

“아니요, 못 봤습니다.”

“왜 못 봤습니까?”

“남천 지날 때 또 깜빡 졸아서 못 봤습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