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딸네한테 받은 휴가길에 찾아뵌 요양병원 어머니

중앙일보

입력 2021.04.30 13:00

[더,오래] 조남대의 은퇴일기(14)

여행은 언제 떠나도 즐겁다. 손주 돌보는 부담을 훌훌 털어 버리고 여행을 다녀오라며 딸로부터 열흘간의 휴가를 받았다. 오랜만에 아내와 오붓하게 보낼 것을 상상하며 자동차에 몸을 실었다.

우리 부부는 딸네 가족과 같은 아파트 아래 위층에 살고 있다. 딸 부부가 맞벌이를 하고 있어 우리가 여섯 살 손녀와 네 살짜리 손자를 돌보고 있다. 육아는 아내가 도맡아 하고 나는 아침에 손주들이 어린이집 갈 때 챙겨 주고, 하원 이후 저녁에 도와주는 보조역할이다. 손주들이 피우는 재롱 덕에 모든 시름을 잊고 생활에 활력을 충전하기도 하지만,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거나 막무가내로 행동하기에 세심한 관심과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

남이섬 부근 북한강변의 풍경. [사진 조남대]

남이섬 부근 북한강변의 풍경. [사진 조남대]

딸 내외는 고생하는 엄마, 아빠에게 휴가를 다녀오라며 남이섬 부근의 숙소까지 예약해 주었고, 손주들은 휴가 동안 대구 시댁으로 보내 사돈이 돌보기로 했다고 한다. 평소에 손주 돌보는 것을 좋아하던 아내도 딸 내외의 깜짝 이벤트에 기분이 들떠 멋진 계획을 세워보라며 채근한다.

열흘간의 휴가를 어디로 갈까 궁리하면서 여행 책자와 인터넷을 뒤져 여행지를 물색했다. 여러 곳을 다녀 보았지만, 경기와 충청도 지역 해안가를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것 같아 그쪽으로 가 보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동안 많은 휴가를 다녀왔지만, 전혀 생각지도 않던 보너스 휴가를 받아 여행을 간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무척 설레면서 가슴이 풍선처럼 부푼다. 멋지고 환상적인 여행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춘천 김유정 문학촌에 복원되어 있는 김유정 생가.

춘천 김유정 문학촌에 복원되어 있는 김유정 생가.

여행 첫날 밤 10시가 지나서야 남이섬 부근 리조트에 도착했다. 북한강에 바로 붙어 있어 전망이 좋을 뿐 아니라, 거실에는 커다란 욕조가 있고 침대에는 영화를 볼 수 있는 스크린까지 설치되어 있다. 손주 돌보느라고 고생하는 부모를 위해 신경을 쓴 것 같아 고맙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뻔한 살림에 지출이 많았을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이튿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30분 거리의 춘천 김유정 문학촌으로 차를 몰았다. 김유정은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했으나, 기생이며 명창인 박녹주에게 빠져 매일 편지를 보내며 열렬히 구애하느라 학교 결석이 잦아 두 달 만에 제적당했다고 한다. 얼마나 사모했으면 잦은 결석으로 퇴학까지 당했을까? 또 실연당했을 때는 얼마나 마음이 쓰라렸을까? 어슴푸레 상상이 된다. 29세로 단명한 것도 실연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 때문이었으리라. 내가 김유정 입장이었다면 제적을 당하면서까지 구애할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상상해 본다. 이런 아픈 상처를 품었었기에 『봄봄』, 『동백꽃』과 같은 심금을 울리는 단편소설이 탄생했나 보다.

서산시 대산읍 황금산 코끼리바위.

서산시 대산읍 황금산 코끼리바위.

서산시 부석면 간월암의 일몰 풍경.

서산시 부석면 간월암의 일몰 풍경.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서해안 섬 투어에 나서 대부도, 영흥도를 거쳐 제부도에 도착했다. 해안가 카페에서 하얀 이를 드러내고 달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면서 따뜻한 커피를 앞에 놓고 여유를 즐기기도 한다. 일출과 일몰을 한곳에서 볼 수 있는 당진 왜목마을 바닷가의 파도 소리가 들리는 온돌방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매일 보는 해돋이와 해넘이지만 바닷가에서 보는 느낌은 새삼스럽고 흥분되기까지 한다. 마음속으로 소망을 떠올리며 기도를 해 본다. 안면도와 간월도를 거쳐 서천까지 달렸다.

장항의 송림 산림욕장에서는 콧속으로 파고드는 진한 솔향에 고향의 소나무숲에서 동무들과 뛰어놀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바닷가에 높이 솟아 있는 기벌포 해전전망대에서는 백제 말과 통일신라 시대 초기 당나라와의 해전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숨진 병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역사 속에 수많은 전쟁이 있었지만 이를 피해 태어나 60년 이상을 평온하게 살아온 나는 엄청난 행운아라는 것을 느꼈다. 좋은 때에 낳아 주신 어머니가 고맙다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휴가가 이틀이나 남았지만, 요양병원에 계시는 어머니를 찾아뵙기 위해 서둘러 대구로 발길을 돌렸다. 91세인 어머니는 노환과 거동 불편으로 요양병원에 모셨다. 처음에는 집에 가고 싶다고 하시더니 어느 정도 적응이 되셨는지 그런 말씀은 하시지 않지만, 자식이 가니까 어린아이가 되신다.

서산시 부석면 간월암 일몰 시에 나타난 빛 내림 현상.

서산시 부석면 간월암 일몰 시에 나타난 빛 내림 현상.

젊었을 때는 동네에서 으뜸가는 미인인 데다 도시로 전근 간 아버지를 대신해 농사일을 도맡아 할 정도로 힘도 셌지만, 콧줄을 낀 채 요양보호사가 미는 휠체어에 비스듬히 앉아 자식을 바라보는 모습이 너무나 낯설다. 코로나로 한 달에 한 번뿐인 가림막 면회로 손도 잡아보지 못하고 큰 소리로 안부만 여쭤본다. 면회를 마치고 헤어질 때는 “고맙다”, “건강해라”라며 자식을 걱정하신다. 끝까지 모셨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죄책감과 측은한 마음 탓에 내내 슬픔에 잠겨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번 여행에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쇠약해지셨다.

고생하며 날 길러준 어머니였건만 요양병원에 보낸 불효자식이다. 나이 들어 나를 요양원에 보내면 무슨 염치로 자식에게 하소연할 수 있으랴. 그때가 되어서야 지금의 어머니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까마는 허전하고 쓸쓸하신 그 마음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삼십 년 후면 나도 어머니와 같은 모습이 될 텐데 아직은 요원한 것처럼 실감이 나지 않는다.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눈시울을 붉히며 서울로 차를 몰았다. 차 안은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장항 송림산림욕장의 울창한 소나무 숲.

장항 송림산림욕장의 울창한 소나무 숲.

장항 송림산림욕장 바닷가에 세워진 기벌포 해전전망대.

장항 송림산림욕장 바닷가에 세워진 기벌포 해전전망대.

이번 휴가를 통해 답답했던 몸과 마음을 힐링하고, 가고 싶었던 곳을 둘러 볼 수 있어 뿌듯하고 행복했다. 딸로부터 받은 휴가가 떠날 때의 설렘처럼 마냥 즐거울 줄만 알았지만 어머니를 뵙고 오니 마음이 무겁다.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은 어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신 죄책감이 마음 한구석을 짓눌렀다. 어서 빨리 코로나가 종식되어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 가는 어머니를 자주 찾아뵐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동북아경제협력위원회 행정위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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