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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도시 그늘에서 일본 엿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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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일본 정부가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수 방류를 결정했다. 어이없다. 평화로운 미래번영을 위한 국제사회의 공동노력도 미흡한 시점에 오염된 쓰레기를 자국의 배타적 이익 위해 무단방출하는 무분별·파렴치·단견적 행동에 천인공노·만인공분을 촉구하며 비분강개·분기탱천·열혈성토하려다, 문득 생각하니 좀 이상하다. 한반도는 후쿠시마와는 일본열도로 막힌 건너편에 있다. 이 문제에 가장 민감해야 할 1차 피해자는 일본 자국민들이니 그들의 반응이 궁금해야 마땅하겠다.

오염수와 처리수의 호명 차이 #항상 민감한 일본 관련 사안 #‘히야까시’에 드러나는 문화 차 #분쟁 승리의 조건은 상대 이해

후쿠시마 어민들도 당연히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그런데 반대이유의 결이 좀 다르다. 오염수 방출로 유전자가 왜곡되고 허리가 구부러진 물고기 등장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잖아도 오염 이미지로 어려움을 겪는 수산물 수출 추가감소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생존 아닌 생계의 문제 수준이었다.

언어는 세계요, 언어는 존재요, 언어는 한계라고 설명한 철학자가 있었다. 이름 지어 부르는 대로 꽃인지 꽃뱀인지 존재의 방식이 규정된다. 오염수(contaminated water)라고 지칭하는 순간 그 물에 대한 입장은 명백해진다. 정제해서 기준에 맞는 수준으로 맞춰 20년간 조금씩 배출하되 그 과정과 현황을 모두 공개하겠다는 게 일본정부의 설명이다. 외국 언론과 기관의 일반적 선택 어휘는 처리수(treated water)다. 그래서 국제원자력기구와 미국 국무부가 지지 성명을 발표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일본·원전·오염수·방류가 골고루 들어있는 문장이면 한국인을 도발할 조건은 충분하다. 일단 일본 관련 사안이라면 한국은 이견불허의 전체주의적 국가로 돌변해왔다. 반일의 깃발 아래 대동단결. 게다가 원전은 미래가치가 부인된 위험천만의 혐오시설로 비난되기 시작한 물건이다. 그런데 심지어 방사능 물질로 오염된 물을 방류하다니. 그 물이 오염수로 호명되는 순간 논의의 빗장은 닫힌다.

물이 흘러들 곳이 동해였다고 치자. 갈등은 더 극심하여 전쟁 전야를 가늠할 사안일 것이다. 실제로 두 나라는 그 바다의 이름만 놓고도 전쟁 중이다. 머리를 식히고 보면 이 대치는 해결책이 없다. 이 바다의 이름이 일본해라면 우리는 애국가를 바꿔 불러야 한다. 일본해와 장백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는 우리나라, 이게 나라냐. 그런데 일본 입장에서는 분명 서쪽에 있는 바다인데 이걸 동해라고 부르라는데 동의될 리가 없다. 그래서 대안은 병기 표기인데 이해관계 없는 지도제작자 입장에서 하나의 바다를 놓고 두 이름을 적으라는 요구를 받아들이기도 어렵겠다. 그래서 제3의 제안도 나왔으니 나는 지도에 ‘청해’로 표기하자는 제안에 마음이 끌린다.

‘히야까시’라는 일본 단어가 있다. 고등학생 시절 지나가는 여학생들에게 지분거리는 행동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당꼬바지’ 교복 입고 ‘히야시’된 사이다 물고 ‘와리바시’로 만두 집던 바람난 고등학생들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저 단어 ‘히야까시’의 의미가 원산지에서는 좀 다르다. 일본에서는 돈도 없으면서 유곽에서 화대 흥정하며 지분거리는 모습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참으로 엽기적으로 일본 문화에서 유곽은 성인놀이터 정도고 유곽종사는 자랑스럽지는 않아도 그냥 직업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식민지에서도 도시 여기저기에 유곽을 조성했다. 성리학 전통이 굳건하던 사회에 도입된 기상천외한 업종은 번역된 모습으로 도시 그늘 곳곳에 남았다. 대체로 역 근방 이면골목에 기이하게 도열한 유리창 풍경이 그것이다. 분홍색 조명으로 밤 밝은 곳이었으나 우리는 그 존재의 호명도 거북하여 차라리 주소의 지번으로 불렀다. 588이라고. 일본인들은 심지어 전시에도 이동유곽을 운영했다. 그게 그냥 직업의 하나라는 이상한 문화와 목숨 걸고 기피해야 할 대상이 어찌 직업이겠냐는 문화 격돌이 지금 우리 땅에 위안부라는 상처와 숙제를 남겼다.

분노하기 전에 살펴보는 게 옳겠다. 상대방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한다는 건 우리가 숙독해 온 전쟁불패의 병법금언이다. 자국문화의 폭력적 강요는 분명 잊지 말아야 하고 여전히 지탄해야 한다. 그러나 목숨은 버려도 약속은 지키는 것이 무사 국가의 문화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이전 정권의 약속을 부인하는 것은 무사 일본이 아니라 어떤 사회에서도 이해하기 어렵다. 사죄는 자결감수의 의사표명인 문화권인데 국왕과 총리마다 사죄를 하라는 건 국가 존재가치를 스스로 부정하라는 요구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이때 이 사안의 논의빗장도 닫힌다.

우리에게 위대한 대통령이 있었다. 과거를 용서하고 개방한다고 천명했다. 무모하다는 주변 의견에도 불구하고 그는 국산 전투기 개발을 결정했다. 국산 전투기 출고식에서 배경에서 선명하게 드러난 것은 무기의 자태 너머 세상을 읽어내던 대정치인의 식견이었다. 상대방에 대한 숙고, 그게 없는 분노배출로 전쟁에서 이기기는 어렵다. 임진왜란부터 한일합방까지 포함하여 우리에게는 역사의 거의 모든 전쟁에서 그게 없었다. 여전히 없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다.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