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조강수의 직격인터뷰

고하 할아버지 암살 트라우마가 평생 외길 걷게 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조강수
조강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송상현 전 국제형사재판소장 인터뷰

조강수 논설위원

조강수 논설위원

“고하 할아버지의 암살을 목격한 뒤 우리 부자는 정치로부터 거리를 두기로 맹세했다. 평생 그 약속을 지켰다.”

아버지와 정치 않기로 골백번 맹세 #노무현에 “로스쿨에 1조 투자” 직언 #‘김영삼 학적부’에 틀린 한자 목격도 #교수 정치참여, 무책임 양다리 안돼

송상현(79) 전 국제형사재판소(ICC) 소장의 입에서 ‘할아버지’ 소리가 여러번 흘러나왔다. 그의 할아버지는 1945년 12월 말 해방 정국에서 정치적 암살을 당한 고하(古下) 송진우(1890~1945)다. 35년의 서울 법대 교수와 12년간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형사재판소(ICC) 초대 재판관·소장으로 외길 인생을 걸어온 송 전 소장을 지난 27일 서울 마포구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회장 집무실에서 만났다. 마침 『고독한 도전, 정의의 길을 열다』라는 제목의 1043쪽 분량의 회고록을 낸 터였다. 그는 “회고록은 자화자찬이 될까 봐 안 쓰려 했으나 어려서부터 쓴 일기와 국제형사재판소 12년 비망록의 팩트를 기록으로 남기자는 차원에서 냈다”고 소개했다. 독립운동가 우당(友堂) 이회영(1867~1932)의 증손자 이철우 연세대 교수는 “고하의 신중함과 냉정함을 송상현 교수님은 다른 방식으로 구현한다. 폴리페서가 창궐하고 진영논리가 난무하는 시대에 어느 정치세력과도 유착하지 않고 어느 진영의 관점도 일방적으로 취하지 않는 냉정함으로.”(『내 마음의 영원한 등대-잊지 못할 스승 송상현 선생』)라고 평가했다.

송상현 전 국제형사재 판소 소장은 지난 27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서울 법대 교수 정년 퇴임 후 ICC 재판관·소장을 거쳐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회장을 맡고 있으니 국제기구 전문가”라며 “모두가 제자와 지인들이 도와준 덕분”이라고 말했다. 김경록 기자

송상현 전 국제형사재 판소 소장은 지난 27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서울 법대 교수 정년 퇴임 후 ICC 재판관·소장을 거쳐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회장을 맡고 있으니 국제기구 전문가”라며 “모두가 제자와 지인들이 도와준 덕분”이라고 말했다. 김경록 기자

그동안 갖가지 유혹이 많았을텐데 어떻게 지탱했나.
“보통 자리 제안이 오면 거절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나는 총리·장관·청와대 수석·대법관 오퍼 다 받았지만 전혀 흔들림없이 거절했다. 이유가 있다. 내가 5세 때 고하 할아버지가 총탄에 암살되는 현장을 봤다. 암살 전날 밤 백범 김구 선생과 경교장에서 신탁통치 문제를 협의한 후 늦게 귀가했다. 원래 사랑채 거실에서 같이 자기로 했었는데 내가 아래채에서 잠드는 바람에 저격범의 총탄을 피해 살아남았다. 시집와서 얼마 안 된 어머니가 피 닦고 피 묻은 이불 뜯어말렸다. 그 후로 아버지하고 정치로부터 거리를 확고하게 두자고 골백번 맹세했다. 커서는 장인(김상협 전 고려대 총장)이 전두환 정권 때인 1982년 갑자기 국무총리로 징발되는 일이 벌어졌다. 1년 7개월여 동안 내가 물밑 잠행하며 도와드렸다. 그 과정에서 대통령제 아래선 총리는 장식품에 불과한 걸 알았다. 오죽하면 ‘대독 총리’라고 했겠나. 그 때 결심한 걸 평생 지키고 한눈 팔지 않았다.”
     고하 송진우 선생

고하 송진우 선생

교수들의 정치 참여에 대한 견해는.
“교수가 전문성을 살려서 정부로 나가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지 않는다. 다만 어떤 분은 국회의원 4년 하고 재선까지 하는 동안 공석으로 둔다. 전임 교수를 구할 수 없어 시간 강사가 땜질한다. 학교와 학생 모두에게 손해다. 무책임한 양다리 관례는 종식돼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로스쿨 도입시 두 가지 대 전제가 갖춰지지 않으면 실패한다고 직언했나.
“맞다. 미국식 로스쿨 도입은 대선 공약이었다. 취임 후인 2005년 사법개혁추진위원회를 가동했는데 로스쿨 경영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나를 콕 집어 위원으로 지명했다.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형사재판소 재판관으로 3년째 근무중일 때였다. 매달 회의가 열렸는데 자비로 귀국해 당일치기로 참석하고 돌아가곤 했다. 사법부의 건전성이야말로 법치를 토대로 한 국가의 근본이라고 믿었다. 법조인 양성의 패러다임 전환에는 찬성했다. 다만 사개추위 위원이던 문재인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을 통해 노 대통령을 따로 만나 두 가지 빅이프(대전제)가 충족되지 않으면 로스쿨은 실패한다고 역설했다. 정부의 과감한 투자와 법학 교수의 의식 개혁 및 교수 방법의 획기적 변환이다. 정부가 첫 해에 적어도 1조원은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안 그러면 참여정부가 추구해온 특혜방지와 평등 달성에 역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노 대통령이 가만히 듣더니 정부가 돈 푸는 문제는 내가 책임질테니 후자는 송 교수가 캠페인하라며 서로 한 건씩 책임지자고 했다. 결국은 아무 것도 안됐다. 요즘도 로스쿨이 삐걱거린다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무겁다.”
서울대 법대 학장 때 김영삼 대통령 학적부를 직접 봤다고 책에 썼다.
“1996년 서울대 50주년 기념 행사에 관여했다. 단과대 학장단이 서울대 총장과 함께 일반 공개 하루 전 추억거리 기념품을 관람하던 와중에 당시 대통령이던 김영삼 학생의 학적부를 목격했다. 거기에 본적(거제)과 주소(중구 회현동)가 기재돼 있었고 서울대 철학과 청강생이라는 기록이 있었다. 그런데 청강생을 한자로 썼는데 ‘들을 청(聽)’자 대신 ‘관청 청(廳)’이라고 잘못 기재돼 있었다. 당시 김 대통령이 정식 학생이 아니라는 소문이 파다하던 때라서 민감한 증거였다. 당황한 교무처장이 그걸 곧 치워버린 후로 그 문서의 행방은 알 수 없다.”
법학자로서 보람찼던 때는.
“1997년 외환위기 때 IMF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았다. 당시 정부 요청으로 기업정리법, 파산법, 화의법 등을 새로 정비했는데 국회에서 그대로 통과됐다. 고도의 자본주의 체계에 맞게 선진적인 틀로 패러다임을 바꾸는 혁신적 입법작업이었다. 특히 파산법은 1900년 독일 법제였다.”

송 전 소장은 2007년 서울대 법대 교수직을 정년 퇴임했다. 이후 초대 재판관(2003년)으로 일해온 국제형사재판소 활동에 전념한다. 2009년 ICC 소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했다. 유엔 시스템의 총수(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와 국제형사정의시스템의 총수가 동시에 한국인이 된 것이다. ICC는 전쟁범죄, 침략범죄, 집단학살범죄, 반인도적 범죄 등 4가지 관할범죄를 저지른 독재자 개인을 단죄해 응보적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유엔과는 별도로 창설된 국제기구다.

2012년 11월 네델란드 헤이그의 기사의 전당에서 열린 국제형사재판소 창립 10주년 기념행사. 앞줄 왼쪽부터 인텔만 당사국총회 의장, 마키 살 세네갈 대통령, 베아트릭스 여왕, 프란스 팀머만스 네델란드 외무장관, 송상현 당시 소장.                                 [송상현 회고록]

2012년 11월 네델란드 헤이그의 기사의 전당에서 열린 국제형사재판소 창립 10주년 기념행사. 앞줄 왼쪽부터 인텔만 당사국총회 의장, 마키 살 세네갈 대통령, 베아트릭스 여왕, 프란스 팀머만스 네델란드 외무장관, 송상현 당시 소장. [송상현 회고록]

그는 “ICC 소장을 하며 5대양 6대주를 오갔고 국왕·대통령·총리 등 100명 이상의 국가 원수급들과 회담을 했다”며 “직원이 1000여명인데 작은 국가의 원수 같은 역할이었다”고 말했다.

초대 재판관에 지명될 때 후보지원서도 안 냈다던데 사실인가.
“그렇다. 박수길 전 유엔대사가 후보로 천거했다. 법조인 자격이 있으면서 영어 소통이 원활해 후보감이라고 봤다고 한다. 나흘간 무려 33차의 표결 통해 각국의 45명 후보 중에서 18명을 뽑는 재판관에 선출됐다. 열흘 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축하 편지를 받고나서야 당선을 실감했다. 2003년 3월 재판관 선서식이 네덜란드 헤이그 시내 ‘기사의 전당’에서 열렸다. 당시로부터 96년 전 고종의 밀지를 갖고 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러 왔던 이준 열사가 입장을 거절당한 통한의 장소였다. 간접적으로 한을 풀었다고 생각했다.”
박근혜 대통령을 헤이그에서 만났을 때 일화는.
“2014년 3월 24일 헤이그 핵안보 정상회의 첫날에 네덜란드 왕이 주최한 오찬장에서의 일이다. 당시 박 대통령이 음식 메뉴가 적힌 종이 뒤쪽 빈 곳에 뭔가를 열심히 메모하고 있었다. 이를 본 왕의 어머니인 베아트릭스 여왕이 무엇을 적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왕의 말씀이 귀하고 참고가 돼서 메모한다’고 대답하더라. 수첩에 깨알같이 메모를 해 갖고 다니던 김대중 대통령과 닮았다.”
가장 기억나는 사건은
“국제형사정의시스템의 첫 적용 케이스가 케냐 정·부통령에 대한 소추 절차다. 2007년 대선 때 부족간 분쟁으로 양민 1100명이 숨진 사건으로 케냐타 대통령, 루토 부통령이 2013년 기소됐다. 현직 대통령이라 근무 중 헤이그 법정 출석이 어려웠다. ICC가 케냐 나이로비로 가서 재판해야 할지, 온라인으로 재판할수 있는지 등 생각지도 못한 법률 문제가 제기됐다. 이런 와중에 ICC 소추 검사가 제출한 증거를 재판부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분쟁 해결에 나섰던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사망하면서 사건도 종료됐다. ICC가 다루는 사건 8개가 모두 아프리카 국가에 집중돼 있다.”
위기는 없었나.
“2008년 5월 ICC가 구속영장을 발부한 수단의 알-바시르 대통령을 이명박 정부가 한국으로 초청한 일이 있었다. 자원외교를 한다고 융숭한 대접을 한 거였다. 유엔 안보리가 제기한 사건이라서 중대한 외교문제였다. 국제사회의 조약상 기본의무에 무지한 것인지, 아니면 경제적 이해관계가 앞서 알고도 조약을 위반한 것인지 통탄스러웠다.”

조강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