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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현철의 시선

'정글 속 빌라'도 햇볕을 막지 못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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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미국 뉴욕 브롱크스 인근 해역에 있는 하트 섬에서 지난해 4월 인부들이 코로나19 사망자들의 시신이 담긴 관들을 파묻고 있다. AP=연합뉴스

미국 뉴욕 브롱크스 인근 해역에 있는 하트 섬에서 지난해 4월 인부들이 코로나19 사망자들의 시신이 담긴 관들을 파묻고 있다. AP=연합뉴스

1년 전, 미국 뉴욕 브롱크스 동쪽 하트 섬 주변에서 떠오른 드론이 인상적인 장면을 담아 세상에 전했다. 밭고랑처럼 길게 패인 구덩이에 방진복을 입은 사람들이 중장비까지 동원해 소나무관을 빽빽하게 채워가고 있었다. 뉴욕주를 중심으로 코로나19 감염으로 인한 사망자가 속출하자 처리 못 한 시신을 급히 묻고 있는 현장이었다. 이마저 자리가 없어 수백 대의 냉동 트럭에 그냥 방치된 시신도 카메라에 잡혔다.

세계의 백신 공장 인도, 패닉 상태 #백신 부자 나라들, 장벽 더 높여 #변이와 기후 변화, 커가는 위험들 #

당시엔 모든 나라가 비슷했다. 어디든 위험했고, 누구나 감염돼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에 떨어야 했다. 하지만 1년 남짓한 시간이 지나면서 사정이 완전히 변했다. 발 빠르게 백신을 확보한 덕에 집단 면역의 문턱까지 온 이스라엘은 지난 17일부터 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를 해제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도 27일 백신 접종을 마친 사람은 실외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된다고 지침을 바꿨다. 전임 트럼프 대통령에 맞서 마스크 의무착용을 밀어붙이던 조 바이든 대통령도 이날부터 실외 행사에서 마스크를 벗었다. 그러곤 이렇게 말했다. “간단합니다. 가서 백신을 맞으세요.”

누구나 그 간단한 해법에 동의한다. 그러나 지난 26일 언론에 보도된 사진은 그럴 수 없는 나라의 비참함을 극단적으로 전해준다. 넓은 공터에 줄을 맞춰 쌓아 올린 수십 무더기의 장작더미가 맹렬한 화염과 매캐한 연기에 휩싸인 임시 화장터의 모습이 처연했다. 인도에선 하루 신규 확진자 36만여명, 사망자 3000여명(아워월드인데이터, 27일 기준)이 쏟아지고 있다. 화장장이 부족해 공원이며 주차장을 임시 화장터로 쓰는 모습은 1년 전 뉴욕 하트 섬과 많이 닮았다.

지난 24일 인도 뉴델리의 코로나 19 임시 화장장. 이날 하루동안 인도에서 2761명이 코로나19로 숨졌다. AP=연합뉴스

지난 24일 인도 뉴델리의 코로나 19 임시 화장장. 이날 하루동안 인도에서 2761명이 코로나19로 숨졌다. AP=연합뉴스

이런 사태가 세계 최대 백신 공장이라고 불리는 인도에서 벌어졌다는 점이 더 큰 아이러니다.  인도 백신 회사 세룸 인스티튜트(SII)는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의 중요한 위탁생산 기지다. 월 생산능력이 1억 6000만 도스(도스는 1회 접종분)에 이른다. 이를 바탕으로 인도는 올 초만 해도 주변 국가들에 백신을 무상으로 나눠주는 여유를 보였다. 세계백신면역연합(GAVI) 등이 주도하는 전 세계 코로나 백신 공동 구매·배분 프로젝트(코백스 퍼실리티)에서도 상반기 공급물량 중 상당량을 떠맡고 있다.

그런데 미국이 2월 초 국방물자생산법을 발동해 백신 원료와 장비를 통제하면서 사정이 꼬이기 시작했다. 백신을 만들려면 280가지 구성품과 필터 등 장비가 필요하다고 한다. 미국과 유럽 회사들이 백신 재료 구매 대기선의 맨 앞으로 끼어들다 보니 전 세계 공급망이 휘청인 것이다. 최근 들어선 SII의 공장 라인들이 하나씩 멈추고 있다고 한다. 결국 인도 정부는 지난달 말 자국 생산분의 해외 반출을 금지했다. 코백스에 의존하던 많은 나라들은 연쇄적으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테워드로스 거브리여수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은 “세계가 파멸적인 도덕적 실패 직전에 있다”고 비판했다.

국제사회에선 완제품을 고루 나눠줄 수 없다면 특허라도 풀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면 이른바 '카피 백신'을 쉽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백신 회사를 보유한 미국과 EU의 완강한 반대를 넘지 못했다. 보다 못한 세계 저명인사 175명이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냈다. 고든 브라운 전 영국총리, 프랑수와 올랑드 전 프랑스 대통령 등도 서명한 서한에는 “특허권 침해 염려 없이 복제 백신을 만들 수 있도록 하라”는 촉구가 적혔다.

이 와중에 미국과 유럽은 이미 확보한 물량과 맞먹는 18억 도스와 13억 도스를 추가로 확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내년과 내후년에 쓸 물량이라고 한다. 이들이 백신 장벽을 높여갈수록 담장 밖 나라들의 불안과 위험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럼 장벽 안쪽은 마냥 안전할까? 그것도 장담하기는 어렵다. 이스라엘의 율리 에델스테인 보건부 장관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상황을 “정글 속의 빌라(Villa)”라고 표현했다. 아무리 빌라가 안전해 보여도 정글에서 득실대는 위험요인이 언제 몰려올지 모른다는 의미다. 백신 장벽 밖에서 계속 생겨나는 ‘변이‘ 바이러스가 대표적이다. 이미 인도에선 2차, 3차 변이를 일으킨 바이러스가 퍼지며 방역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덧붙이자면 백신 민족주의가 만연할수록 기후변화 대응 같은 국제적 공조 명분도 설 자리를 잃는다. 모든 나라가 조금씩 지금의 성장을 희생해야 지구의 파멸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당장 급할 땐 “우리부터”를 외친 선진국들의 주장이 과연 설득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 장벽은 백신과 감염자는 막을 수 있겠지만 몰아치는 비바람과 쏟아지는 눈보라, 내리쬐는 햇볕까지 막지는 못한다.

최현철 정책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