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땅에 20년 둔 조상묘, 이제 주인이 원하면 돈 내야한다

중앙일보

입력 2021.04.29 18:32

업데이트 2021.04.29 22:14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29일 오후 '지료청구' 사건에 대한 선고를 진행하고 있다. [대법원 제공]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29일 오후 '지료청구' 사건에 대한 선고를 진행하고 있다. [대법원 제공]

남의 땅에 쓴 묫자리를 장기간 문제없이 관리해 그 땅에 대한 권리(분묘 기지권)를 취득했더라도 이제부터 땅 주인이 사용료를 청구하면 줘야 한다. 대법원이 관습법을 인정해 사용료를 주지 않아도 된다는 기존의 판례를 뒤집었기 때문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김명수, 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29일 11대 2의 의견으로 땅 주인 A씨 등이 분묘 기지권자 B씨를 상대로 낸 지료(地料) 청구소송에서 A씨가 일부 승소한 원심을 확정했다.

A씨 등은 2014년 경기 이천의 임야 4969㎡의 지분을 취득했다. 그런데 이 땅 중 400㎡에는 1940년과 1961년에 사망한 B씨의 조상 묘가 있었다. B씨는 이 묘를 20년 넘게 별문제 없이 관리해와 ‘분묘 기지권’을 시효 취득한 상태였다.

땅 샀더니 20년 넘은 묘지…"사용료 내라" 분쟁

분묘 기지권(墳墓基地權)이란 다른 사람의 땅에 설치된 묘지를 소유하기 위해 묫자리가 있는 땅을 사용하는 권리를 말한다. 땅 주인의 승낙을 얻었거나, 묘가 설치된 땅을 팔면서 이장에 대해 특약을 하지 않은 경우, 남의 땅에 설치한 묘이지만 20년 넘게 별문제 없이 점유해온 경우라면 분묘기지권이 인정된다.

B씨는 세 번째 경우인 ‘취득시효형 분묘 기지권’을 관습법상 인정받는 셈이다. 다만 2001년 1월부터 시행된 '장사(葬事) 등에 관한 법률'은 땅 주인의 승낙이 없는 분묘와 그 연고자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아서 취득시효형 분묘 기지권은 2001년 이전에 설치된 묘에만 인정된다.

2016년 1심은 A씨의 청구를 기각했다. 대법원 판례로 인정되어온 분묘 기지권을 그대로 인정한 것이다. 그로부터 1년 뒤 항소심은 1심을 뒤집는 판결을 했다. 토지소유자는 분묘 기지권 때문에 나머지 땅 사용에도 많은 제약을 받게 되는 것이 현실인데, 묘지가 있는 땅에 임대료조차 받지 못한다고 보는 것은 심히 부당하다는 취지다. 2심은 적어도 땅 주인이 사용료를 청구한 때부터는 그 분묘 부분에 대한 지료를 지급할 의무가 있다는 판결을 했다.

2심 판결 이후 4년이 지난 2021년, 대법원은 분묘 기지권에 대한 기존 판례를 바꿔야 한다는 결론을 내놨다. 분묘 기지권처럼 관습법으로 인정된 권리의 내용을 확정할 때는 그 권리의 취지와 당사자 사이의 이익형량, 전체 법질서와의 조화를 고려해야한다는게 다수의견의 근거다.

대법원 “분묘 기지권자, 땅 주인이 청구한 때부터 사용료”

지금까지 땅 소유자는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만들어진 분묘기지권 때문에 불이익을 감수해왔다. 대법원은 “땅 주인에게 일정한 범위에서 토지 사용 대가라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당사자 간 이해관계를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방안”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관습법으로 인정된 분묘 기지권을 쉽게 배척할 수는 없다. 분묘기지권에는 우리 민족의 조상숭배사상이나 매장 중심의 장묘문화 등 역사적·사회적 배경이 법률관계와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다수의견은 “처음 묘가 설치된 시점이 아니라 땅 주인이 지료를 청구한 시점부터 지료를 받을 수 있다”고 제한을 뒀다. 만약 묘를 설치한 시점까지 소급해 지료를 받도록 하면 묘 주인이 이를 부담하지 못할 경우 분묘기지권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별개의견을 낸 3명의 대법관(이기택, 김재형, 이흥구 대법관)은 분묘를 설치한 때부터 땅 주인에게 사용료를 지급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헌법상 재산권 보장의 원칙이나 민법상 통상적인 소유권 효력 등에 비춰볼 때 당사자간 무상 사용 합의가 없었다면 처음 사용 시부터 소급해 대가를 내야 한다는 취지다.

아예 기존 판례처럼 분묘 기지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반대의견도 있었다. 안철상, 이동원 대법관은 관습법상 분묘 기지권을 인정해온 취지로 볼 때 20년 동안 아무 문제 없이 묘를 점유했다면 토지 소유자도 이를 묵시적으로 용인했거나, 적어도 분묘 기지권자는 그렇게 생각하고 묘를 관리해왔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판결했다.

땅 주인이 청구해야 '지료' 인정

이날 전원합의체 판결로 분묘 기지권을 시효 취득한 이들은 땅 주인이 재판을 통해, 또는 당사자 간 협의로 땅 사용료를 청구하면 그때부터 이를 지급할 의무가 생긴다. 이때 지료의 구체적인 액수는 당사자 간 협의로 정하거나 당사자의 청구에 따라 법원이 정할 수 있다.

만약 분묘 기지권자가 지료를 2년 치 이상 지급하지 않으면 땅 주인이 법원에 분묘기지권 소멸을 청구할 수 있다. 다만 이때 미리 서로 간지료 액수를 정해두지 않았다면 청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어 사용료가 얼마인지가 먼저 결정돼야 한다.

대법원 관계자는 “분묘 기지권의 시효취득을 인정한 관습법을 존중하되, 토지 소유자의 일방적 희생을 막으며 사유재산권을 존중하는 취지의 해석”이라고 판결 의미를 설명했다.

이수정 기자 lee.suje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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