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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중 원조"…장충동족발집 '뚱뚱이 할머니' 전숙열씨 별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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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장충동 '뚱뚱이 할머니집' 창업자 전숙열씨. 고석현 기자

서울 중구 장충동 '뚱뚱이 할머니집' 창업자 전숙열씨. 고석현 기자

원조, 원조, 원조….

서울 중구 장충동 족발 골목의 식당들은 하나같이 '원조'란 자부심을 간판에 담고 있다. 이곳에 처음 터를 잡은 족발집 '장충동 뚱뚱이 할머니집' 창업자 전숙열씨가 지난달 12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93세.

60여년 이곳을 지켜온 전 할머니의 족발집은 항상 문전성시였다. 할머니가 느긋한 모습으로 계산대에 앉아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모습이 선하다. 10년 전 전 할머니와 긴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당시 80세를 넘긴 나이었음에도 그는 나이를 잊은 듯했다. '손님이 이렇게 몰려드는데 힘들지 않으시냐'고 묻자 "6·25 때 고생했던 걸 생각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하며 웃어 보였다.

고인은 평안북도 곽산 출신으로, 만주를 거쳐 1943년 서울에 정착했다. 당시 장충동에는 일제 강점기 뒤 일본인들이 돌아가며 비어있는 적산가옥이 많았고, 한국전쟁 뒤 실향민들이 모여들며 실향민촌이 형성됐다.

전 할머니가 처음부터 족발집을 하려 했던 건 아니었다. 57년, 30살의 나이에 먹고살 길이 궁해 판잣집에서 식탁 4개를 놓고 녹두를 갈아 얇게 부친 빈대떡을 파는 게 음식장사의 시작이었다. 주머니 가벼운 이들은 이곳에 모여 술 한잔 기울이며 허기를 달랬고 고된 하루를 넘겼다.

족발은 그런 손님들이 "배를 채울 다른 안주가 필요하다"고 말해 생겨난 메뉴였다. 당시 돼지 족이 저렴했는데, 할머니는 어릴 적 만주에 살 때 어머니가 돼지 족에 된장을 발라 삶았던 기억을 더듬었다고 했다. 하지만 메주를 띄워 된장을 담글 여건이 되지 않아 간장으로 간을 하게 됐고, 그게 현재까지 이어졌다고.

손님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실향민들 사이에서 "고향의 맛"이라는 입소문이 나며 족발은 이 가게의 정식 메뉴로 자리를 잡게됐다. 비슷한 시기 일대에 족발집들이 줄줄이 들어서며 '장충동 족발 골목'이 형성됐다. 그는 명절에도 꼭 가게를 열었다. 당신이 실향민이었기에 '나처럼 고향 없는 사람도 이럴 때 밥 먹을 곳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게 이유였다.

서울 중구 장충동 족발집 '뚱뚱이 할머니집' 옛 전경. [사진 서울시]

서울 중구 장충동 족발집 '뚱뚱이 할머니집' 옛 전경. [사진 서울시]

전 할머니가 '뚱뚱이 할머니집' 상호를 쓰기 시작한 것은 68년부터다. 풍채 좋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단골손님들이 '뚱뚱이'라고 장난섞인 별명을 붙였던 걸 상호에 썼다고 했다. 83년 현재의 위치인 도로변으로 가게를 옮겼다.

할머니 족발이 한결같은 맛을 유지한 비결은 '비법 육수'였다. 전 할머니는 "오래된 국물을 써야 지금과 같은 색과 맛이 나온다"며 자연 재료만으로 족발을 삶고 국물이 부족해지면 물과 간장을 넣어 다시 졸이는 방식을 쓴다고 했다.

TV의 음식 프로그램에도 자주 소개됐다. 지난 2007년 방영된 KBS 드라마에선 배우 김을동이 전 할머니를 모티브로 삼아 '뚱땡이 할매 족발집' 사장 역할을 맡기도 했다. 지난 28일엔 중소벤처기업부의 '백년가게'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고인은 90년 12월 며느리에게 사장자리를 넘겨줬고, 현재는 그의 손녀들이 이어받았다.

고석현 기자 ko.suk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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