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이재용 사면론의 정치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고상한 척, 모호하게 제목을 달 때는 대개 자신이 없거나 의도를 숨기고 싶어서다. 이번엔 둘 다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면론이 딱 그렇다. 사면을 주장하든 반대하든 글과 정반대의 역효과가 날 수 있다. 다루지 않느니만 못한 결과다. 개인적 경험도 꽤 있다. 대표적인 게 1999년 6월 말 삼성자동차 법정관리 기사를 단독 보도했을 때다. 극도의 보안을 유지했는데도 어찌 알았는지 담당 장관이 전화했다. “기사가 나가면 절대 안 된다”며 그는 “첫째, 중앙일보에서 쓰면 삼성과 짜고 친다고 할 것이다. 둘째, 삼성 뜻과 달리 역효과가 날 것이다. 셋째, 중앙일보에도 도움이 안 된다”고 했다. 당시는 중앙일보가 삼성에서 계열 분리한 후였지만, 세상은 여전히 둘을 같이 묶어 봤다. 곡절 끝에 기사는 게재됐지만 역풍이 컸다. 그 뒤 삼성 이슈는 아주 조심해서 다루거나 외면하게 됐다. 배밭에서 갓끈을 고쳐매지 않으려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재용 사면론은 쓰지 않을 수 없다. 오로지 국익 때문이다.

586의 선악 이분법 극복하고 #진영 논리 넘어서야 국익 지켜 #국정 철학 대전환 계기 됐으면

최근 사면론의 급속 확산은 이 부회장이나 청와대에 부담이다. 우선 시기가 좋지 않다. 사면권은 대통령에게 있다. 그렇다고 마구 행사할 수는 없다. 재벌 총수 사면은 민생·교통 사범과 중소기업인 수백~수천 명과 묶어 처리하는 게 정치적 부담이 적다. 그러자면 부처님 오신 날(5월 19일)은 너무 촉박하다. 광복절 특사는 너무 많이 남았다. 그 안에 여론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 역풍이 심하게 불면 내심 삼성 측이 기대하는 9월 가석방(형기 3분의 2를 마친 시점)도 물 건너갈 수 있다. 조기 사면론이 이 부회장에게 꼭 유리한 것만은 아니란 얘기다.

이 부회장 개인 신상이나 청와대의 정치적 고려는 그러나 이번 사면론의 본질이 아니다. 본질은 국익이다. 경제5단체장과 종교계까지 나선 것은 세계 반도체 패권 전쟁을 그만큼 심각하게 보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서 삼성이 무너지면 한국 경제가 무너진다. 이 부회장의 구속은 미국과 중국에 특히 안 좋은 신호를 보낼 수 있다. 4류 정치가 1류 기업을 완벽히 지배하는 한국의 현실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반도체 전쟁에서 삼성은 갑이지만 한국 정부는 아니다. 을 또는 병이다. 미국·중국 입장에선 을·병을 압박하는 게 훨씬 쉽다. 을이 알아서 갑을 움직여 줄 테니. 미국과 중국의 그런 계산을 막으려면 이 부회장을 조기 사면하는 게 전략적으로 옳다.

사면론의 최대 걸림돌은 진영 논리다. 집권 586 세력과 핵심 지지층에 재벌=악=규제 대상이다. 이를 통해 경제민주화=공정=분배 정의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정권의 핵심 가치요, 철학이자 버릴 수 없는 우상이다. 이 부회장의 사면은 이런 우상을 단번에 파괴하는 행위다. 더 나아가 기업인을 놔주겠다는 신호, 경제를 정치의 볼모로 잡지 않겠다는 약속, 규제를 풀겠다는 반성, 기업을 국유화하지 않겠다는 전향이기도 하다. 크게 보면 586의 선악(善惡) 이분법을 극복하고 국정 철학의 근본을 바꾸는 일이다.

대통령인들 정치적으로 감당하기 쉽지 않다. 내년 대선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유력한 시나리오 중 하나인 4자 대결(친문+이재명 경기지사+윤석열 전 검찰총장+국민의힘 후보) 땐 핵심 지지층의 결속이 승패를 가를 가능성이 크다. 국익보다 진영을 우선하는 기득권 정치 세력에게 삼성 총수 사면은 언감생심이다. 청와대가 “검토한 바 없고, 검토 계획도 없다”고 한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문 대통령이 온갖 정치적 부담을 딛고 사면을 결행할지는 알 수 없다. 진영과 국익이 부딪칠 때 늘 진영 쪽에 섰던 4년간의 국정에 미뤄 짐작하면 이번에도 기대 난망이다. 결과 역시 예측할 수 있다. 좀 더 빨리 죽어가는 한국 경제일 것이다. 그래놓고 재집권에 성공한들 무슨 영화를 보겠는가. 위대한 리더는 한 번의 결단으로 국민 가슴에 남는다. 문 대통령에겐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 부디 진영을 넘어 나라를 구하시기 바란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