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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맹이 빠진 대통령의 ‘기후 연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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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천인성 기자 중앙일보 모바일24부디렉터(EYE)
천인성 사회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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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날인 지난 22일, 경남 고성군의 고성하이 석탄화력발전소에 환경 활동가와 주민들이 모였다. 시험가동 중인 석탄발전소에 온실가스·미세먼지 배출의 ‘죄’를 물으며 ‘압류 딱지’를 붙이는 퍼포먼스를 했다. 올해 가동하는 고성하이 1·2호기는 계획대로라면 2051년까지 가동된다. 이곳뿐 아니다. 강원도 삼척 등에 총 7기의 석탄발전소가 새로 건설 중이다. 참가자들은 지난해 대통령의 ‘2050 탄소중립’ 선언에도 불구하고 석탄발전소 신설·가동 계획을 수정하지 않는 정부를 성토했다.

그날 밤 기후 정상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한 연설은 다시 한번 시민과 환경단체, 국제사회의 기대를 저버렸다. 연설의 핵심은 한국의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높여 연내 유엔(UN)에 제출한다는 것, 해외 석탄발전소에 대한 신규 금융지원을 중단하겠다는 것, 두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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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알맹이’가 빠졌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주도한 이번 회의는 각국의 구체적인 감축 목표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대통령은 이번에도 ‘숫자’를 내놓지 않았다. 미국·유럽연합(EU)·영국은 물론 탄소중립에 소극적인 일본까지 강화된 감축 목표를 밝힌 것과 대비된다. 연내 상향을 약속하긴 했으나, 새로운 얘긴 아니다. 이미 정부는 지난해 말 ‘2050 장기저탄소발전전략(LEDS)’을 유엔에 내면서 “이번 정부 임기 내 상향하겠다”고 했다. 대통령 임기가 1년여밖에 남지 않았으니, 시한을 서너 달 당겼을 뿐이다. 온실가스·미세먼지 감축과 직결된 ‘탈(脫) 석탄’도 진전이 없었다. 이미 진행중인 석탄발전 해외 투자, 건설 중인 7기의 국내 석탄발전소는 언급조차 없었다.

대신 지난해 유엔총회에 이어 “석탄발전 의존도가 큰 개발도상국의 어려움이 감안돼야 한다”는 주장을 반복했다. 선진국과 개도국의 격차를 고려하자는 논리가 완전히 틀린 건 아니지만, 한국의 감축 부담을 더는 데 도움이 될 지 모르겠다. 27일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이 자랑삼아 말했듯 한국은 “GDP 규모로 세계 10대 대국”이다. 그런데도 개도국 논리에 숨으려 한다면 선진국·개도국 모두로부터 “세계 9위 온실가스 배출국의 책임 회피”란 비난만 살 게 뻔하다.

탄소중립·그린뉴딜을 선언하고도 탄소감축은 피하는 정부의 태도는 국민·기업에도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 탄소 규제가 뉴노멀로 자리 잡는 세계적 흐름을 놓치고 변화를 준비할 시간을 놓칠 수 있다. 탄소중립은 환경·외교 차원을 넘어 경제·일자리의 문제가 됐다. ‘탈원전’에 쏟았던 노력의 반의 반만이라도 했으면 한다.

천인성 사회기획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