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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컬렉션엔 국보·보물 60점…이중섭·모네 대표작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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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 작품 한 달에 100점씩만 전시해도 20년 걸릴 규모

고 이건희 삼성 회장 유족들은 ‘이건희 컬렉션’ 중 가장 가치가 높은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비롯해 세계적 거장들의 작품 등 총 2만3000여 점 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등 공공기관에 기증했다. 사진은 김홍도 ‘추성부도’(보물 제1393호) 55.8x214.7㎝ 1805년. 중국 송대(宋代) 구양수(歐陽修·1007~1072년)의 시 ‘추성부(秋聲賦)’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가을밤의 스산한 분위기가 잘 드러나 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고 이건희 삼성 회장 유족들은 ‘이건희 컬렉션’ 중 가장 가치가 높은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비롯해 세계적 거장들의 작품 등 총 2만3000여 점 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등 공공기관에 기증했다. 사진은 김홍도 ‘추성부도’(보물 제1393호) 55.8x214.7㎝ 1805년. 중국 송대(宋代) 구양수(歐陽修·1007~1072년)의 시 ‘추성부(秋聲賦)’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가을밤의 스산한 분위기가 잘 드러나 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이 평생 모은 미술품 2만3000여 점이 국가에 기증된다. 유족이 기증을 결정한 문화재·미술품은 국립중앙박물관 2만1600여 점, 국립현대미술관 1400여 점 등 사상 초유의 규모다. 한 달에 100점씩만 전시한다고 해도 20년간 이어지는 양이다. 국보를 비롯해 근대미술의 한국 대표 작가와 서양 거장 작품을 망라했다. 한국 근현대 작가 작품 일부는 광주시립미술관, 전남도립미술관, 대구미술관, 제주 이중섭미술관, 강원도 양구 박수근미술관 등 각 지역에도 기증한다. 규모와 퀄리티에서 유례가 없는 세기의 기증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2만1600점 #국립현대미술관에 1400점 기증 #“이 회장, 작품 살 때 8시간씩 회의” #6월부터 순차적으로 국내외 전시

‘청화백자죽문강병’(국보 제258호). 백자로서는 드물게 8각으로 전면 모깎기를 한 병이다. 밑지름 11.5㎝, 입지름 7.6㎝, 높이 40㎝, 18세기.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청화백자죽문강병’(국보 제258호). 백자로서는 드물게 8각으로 전면 모깎기를 한 병이다. 밑지름 11.5㎝, 입지름 7.6㎝, 높이 40㎝, 18세기.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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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기증품은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 216호)를 비롯해 단원 김홍도의 마지막 그림 ‘추성부도’(보물 1393호), 고려 불화 ‘천수관음보살도’(보물 2015호) 등 국가지정문화재만 60점(국보 14점, 보물 46점)에 달한다. 그중 단연 주목받는 게 겸재가 76세에 그린 ‘인왕제색도’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겸재의 최고 걸작일 뿐만 아니라 한국 회화사에서 진경산수의 최고봉에 있는 작품”이라며 “이 한 점의 가치만 해도 돈으로 따질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귀한 작품을 유족이 내놓았다는 것은 이번 기증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의 빈틈을 메우는 데 기여하겠다는 강력한 뜻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8세기 통일신라 보살상 양식과 특징을 잘 보여주는 ‘금동보살입상’(국보 제129호).

8세기 통일신라 보살상 양식과 특징을 잘 보여주는 ‘금동보살입상’(국보 제129호).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겸재가 1751년에 인왕산을 바라보며 장맛비가 내린 뒤 맑게 갠 뒤의 풍경을 그린 것”이라며 “바위산이 많은 인왕산의 절경이 겸재의 사실적 기법으로 탁월하게 묘사돼 있다”고 평가했다. 이번에 기증된 작품은 1946년 박물관 개관 이래 전체 기증품 5만여 점의 절반(43%) 가까운 규모. 국립중앙박물관은 이로써 총 43만여 점의 문화재를 소장하게 됐다.

김홍도·김환기·박수근·장욱진 그림 포함

‘월인석보’ 권11. 1459년(세조5) 간행된 석가 일대기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월인석보’ 권11. 1459년(세조5) 간행된 석가 일대기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은 이중섭의 대표작 ‘황소’를 비롯해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 장욱진의 ‘소녀/나룻배’ 등 한국 대표 근대미술품 460여 점에 더해 클로드 모네, 폴 고갱, 오귀스트 르누아르, 살바도르 달리, 호안 미로 등 세계적 거장들의 대표작을 기증받았다. 특히 인상주의 화가 모네가 1919~20년에 그린 ‘수련이 있는 연못’은 모네 후기를 대표하는 명작 중 하나로 꼽힌다. 이번 기증작과 구도·크기가 거의 같은 모네의 다른 작품이 다음 달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에 시작가 4000만 달러(약 445억원)로 나올 예정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연간 소장품 구입비는 올해 기준 48억원. 10년치를 모아야 모네의 이런 작품 하나를 살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고려 불화 ‘천수관음보살도’ 93.8x51.2㎝.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고려 불화 ‘천수관음보살도’ 93.8x51.2㎝.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은 “역사에 비해 소장품이 적은 국가미술관 입장에서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작품들을 기증받아 감격스럽다”면서 “예술적 국격을 올려주는 일이며, 유족들이 큰 결심으로 국민에게 통 큰 선물을 줬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수준의 컬렉션이 국가 미술관에 들어오는 것을 내 생에 두 번은 볼 수 없을 것”이라며 “그 보답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은 보존과 연구, 전시의 책무에 온 역량을 쏟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립현대미술관은 69년 개관 이래 이번 기증품을 포함해 총 1만200여 점의 작품을 갖게 됐다. 이 중 5400여 점이 기증품인데, 이번 1400여 점은 역대 최대 규모다.

이중섭 ‘황소’ 1950년대.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중섭 ‘황소’ 1950년대.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호재 가나아트·서울옥션 회장은 “이건희 회장의 미술품 구입에 대한 관심과 열정, 엄청난 공도 기록돼야 한다”며 “나중에 돈이 되느냐는 고민의 대상이 아니었고 사람들이 후에 그것을 볼 가치가 있느냐를 염두에 두었다”고 했다. 이어 “작품 구입 회의를 할 때 4~8시간 했고, 늘 치밀한 공부로 만나는 화상들을 긴장시킨 분”이라고 돌이켰다.

“미술사적 작품,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

김환기 ‘여인들과 항아리’ 1950년대.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김환기 ‘여인들과 항아리’ 1950년대.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클로드 모네 ‘수련이 있는 연못’ 1919~1920년.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클로드 모네 ‘수련이 있는 연못’ 1919~1920년.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의 기증을 문화예술계는 크게 반기고 있다. 뛰어난 미술품의 해외 유출을 막고, 국공립 기관 소장품 수준을 한껏 높이게 됐다는 점에서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이번 기증으로 삼성가는 ‘한국의 메디치가’라는 영예로운 타이틀을 한동안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번 기증은 우리 문화예술계가 받은 큰 선물인 동시에 도전이 될 것”이라며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전례 없는 규모의 기증을 어떻게 가꿔 나갈지 무거운 숙제를 떠안게 됐다”고 말했다.

박수근 ‘절구질하는 여인’ 1954년.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박수근 ‘절구질하는 여인’ 1954년.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장욱진 ‘소녀’ 1939년.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장욱진 ‘소녀’ 1939년.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마르크 샤갈 ‘붉은 꽃다발과 연인들’ 1975년.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마르크 샤갈 ‘붉은 꽃다발과 연인들’ 1975년.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번을 계기에 인식 전환과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무엇보다 미술품 수집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왜곡된 시각이 교정돼야 한다”며 “이건희 컬렉션 규모만큼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많은 분이 소장품을 기증해 왔다. 그런데 우리가 이 기증받은 작품을 어떻게 예우했는지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살바도르 달리 ‘켄타우로스 가족’ 1940년.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살바도르 달리 ‘켄타우로스 가족’ 1940년.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번 기증품은 6월부터 국민에게 공개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6월 ‘고 이건희 회장 소장 문화재 특별공개전’(가제), 내년 10월 대표 명품을 선별 공개하는 ‘고 이건희 회장 소장 문화재 명품전’(가제)을 연다. 국립현대미술관은 8월 서울관 ‘고 이건희 회장 소장 명품전’을 시작으로 9월 과천, 내년 청주 등에서 특별전·상설전을 연다. 지역 공립미술관·해외 주요 미술관 순회전도 연다.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김호정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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