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발표된 이건희(1942~2020) 삼성그룹 회장의 고미술 기증 목록 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겸재 정선(1676~1759)의 ‘정선필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국보 제 216호)다. 비온 뒤의 인왕산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정선의 400여점의 유작 가운데 가장 크다(가로 138.2㎝, 세로 79.2㎝). 이날 기증품 활용방안 관련 브리핑에서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미술적·역사적·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뛰어나다”고 콕 집어 예시했고 “삼성가에서도 굉장히 애착을 가진 소장품 중 하나”(국립중앙박물관 박진우 유물관리부장)라는 설명이 잇따랐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인왕제색도' #노년의 정선이 그린 진경산수화 대표작 #수집가 진호섭 거쳐 전후 삼성가로 간 듯
정선이 76세 때인 영조 27년(1751) 그렸다. 당시 그는 어릴 적부터 인왕산 인근에 살며 시화쌍벽으로 평생을 교우해온 사천 이병연(1671~1751)이 81세로 타계하자 큰 슬픔에 빠졌다. 이를 달래고자 사천과 함께 자주 올랐던 북악산 남쪽 서록 즉 지금의 청와대 별관 서쪽 산등성이에 올라 인왕곡 일대를 바라보며 비안개가 개이는 정경을 장쾌한 필법으로 휘둘렀다. 비에 젖은 뒤편 암벽의 매끄러운 질감을 나타내기 위해 먹물을 가득 묻힌 큰 붓을 반복해서 아래로 내리긋는 대담한 필치를 구사했다. 좀 더 가까이에 있는 능선과 나무들은 섬세한 붓질과 짧게 끊어 찍은 작은 점으로 실감나게 표현했다. 이제까지 산수화가 중국의 것을 모방하여 그린 데 반해 직접 우리 경치를 보고 그린 진경산수화로서 미술사적으로 높이 평가되는 걸작이다.
‘인왕제색도’는 조선 후기 노론 벽파의 영수로 잘 알려진 심환지(1730~1802)가 소장해 그 문중으로 전해졌다. 심환지는 말년에 해당하는 1780년대부터 타계하기까지 서울 북촌의 삼청동에 거주하면서 조선 후기 대표적 서화가들의 작품을 수집했고, 수집 작품마다 소장 경위를 밝힌 발문을 첨부했다. 현재는 그림과 분리돼 기록으로만 전하는 이 발문을 통해 현재는 한폭의 그림처럼 보이는 ‘인왕제색도’가 애초엔 병풍 형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미술사학자 최완수의 『겸재의 한양진경』(2004)에 따르면 그림은 일제강점기 대동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언어학자 최원식이 소장했다가 이후 개성의 이름난 부호이자 골동수집가였던 욱천 진호섭(1905~1951)에게로 넘어갔다. 진호섭은 1948년 삼성무역주식회사 사장을 지냈는데 학계에선 이 인연으로 삼성가에 인왕제색도를 넘긴 것으로 추정한다(황정연, ‘심환지의 서화수집과 수집-18세기 경화사족 수장가의 재발견’, 『대동문화연구』105호). 삼성미술관 리움 출범과 함께 이곳에 소장돼왔고 1984년 국보로 지정됐다. 2014년 리움의 개관 10주년 때 또다른 겸재의 걸작 ‘금강전도’(국보 217호)와 함께 전시되기도 했다.
한편, 인왕제색도와 함께 국립중앙박물관에 전달되는 9797건(2만1600여점)의 기증품에는 청동기 시대 주술용 세트로 추정되는 '전 덕산 청동방울 일괄'(국보 제255호)과 현존하는 고려 유일의 ‘고려천수관음보살도’(보물 제2015호), 단원 김홍도의 마지막 그림인 ‘추성부도’(보물 제1393호), 조선 세조 때 편찬한 불교서 ‘월인석보’ 권11, 12(보물 제935호) 등 국보 14건, 보물 46건이 포함돼 있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