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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석 "포탄에 배 터져 죽은 사촌…난 덤으로 받은 삶 살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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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내가 만난 정진석 추기경-①젊은 날의 상처와 고뇌

늘 가슴이 뛰었습니다.

정진석 추기경이 현직에 있을 때도 그랬고, 은퇴 후 서울 종로구 혜화동 주교관에 머물 때도 그랬습니다. 정 추기경과 수차례 단독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매번 그랬습니다. 인터뷰는 ‘판에 박힌 문답’이 오간 적이 없었습니다. 정 추기경은 늘 내면에서 길어올린 목소리로 답을 했습니다. ‘추기경’ 혹은 ‘주교’라고 하면 뭔가 근엄하고, 다소 권위적이기도 하면서, 조직 운영에 해가 가지 않게끔 적당한 선에서, 교과서적이고 교리적인 답변을 하리라 예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정진석 추기경은 달랐습니다.

정진석 추기경은 인터뷰에서 까다로운 질문을 던져도 늘 울림 있는 답변을 내놓았다. 그것은 생활 속에서 수도자처럼 이어지는 묵상과 기도의 결과물이기도 했다. [중앙포토]

정진석 추기경은 인터뷰에서 까다로운 질문을 던져도 늘 울림 있는 답변을 내놓았다. 그것은 생활 속에서 수도자처럼 이어지는 묵상과 기도의 결과물이기도 했다. [중앙포토]

그중에서도 잊히지 않는 건 ‘정 추기경의 젊은 날’ ‘젊은 날의 상처’에 대한 문답이었습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한국 가톨릭을 대표하는 추기경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상처’를 이야기한다는 게 말입니다. 그렇지만 서울 명동성당 주교관에서 만난 정 추기경은 평소처럼 담담하게, 또 소탈하게 물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추기경의 답에는 ‘정진석의 삶’이 오롯이 녹아 있었습니다.

#풍경1

정진석 추기경은 외아들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입장에서도, 아들의 입장에서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나뿐인 아들을 사제로 출가시키는 일 말입니다. 왜냐고요? 사제가 된 후에는 곁에 머물면서 부모의 노후를 책임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외아들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1939년 여덟 살 때 서울 종현성당(현 명동대성당)에서 첫 영성체를 한 정 정진석 추기경이 기념 사진을 찍었다. [사진 천주교 서울대교구]

1939년 여덟 살 때 서울 종현성당(현 명동대성당)에서 첫 영성체를 한 정 정진석 추기경이 기념 사진을 찍었다. [사진 천주교 서울대교구]

더구나 정 추기경은 외가에서 자랐습니다. 친가와 외가 모두 4대째 독실한 천주교 집안이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는 일본으로 간 뒤에 연락이 끊겼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그러니 홀어머니와 외아들 사이의 정이 얼마나 애틋했을까요.

정 추기경은 서울 종로구 수표동에서 태어났습니다. 10살 때부터 명동성당 복사(服事)를 했습니다. 미사 등 천주교 예식 때 보조하는 일입니다. 매일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났습니다. 수표동에서 명동성당까지, 어둑어둑한 새벽길을 걸어 다녔습니다. 사람들은 다들 자는 시간이었습니다. 첫 전차는 오전 5시가 돼야 다녔습니다. 너무 무서워서 전찻길 한복판으로 다녔다고 합니다. 어두운 골목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까요.

“어떻게 3년간 하루도 안 빠졌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것도 10살짜리 어린아이가 말입니다. 어린 시절을 회고하던 정 추기경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자고 있을 때, 나는 깨어 있다. 사람들이 다들 자고 있을 때, 나는 큰일을 하러 간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나중에 돌아보니 저 자신을 이겨내는 큰 훈련이 됐더군요. 새벽에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싫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인 첫 주교인 노기남 대주교(가운데)의 착좌식에서 복사를 사고 있는 어린 시절의 정진석 추기경(왼쪽 맨앞줄). [사진 천주교 서울대교구]

한국인 첫 주교인 노기남 대주교(가운데)의 착좌식에서 복사를 사고 있는 어린 시절의 정진석 추기경(왼쪽 맨앞줄). [사진 천주교 서울대교구]

#풍경2

쉽지 않은 일입니다. 10살 아이가 새벽에 일어나 3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당에 가는 일 말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면의 근육’이 떠올랐습니다. 어릴 적부터 단련한 마음 근육 같은 것 말입니다. 그래서 좀 더 물었습니다.

“왜 중간에 포기하지 않았습니까?” 답변은 이랬습니다. “새벽 미사 참석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힘든 일을 이겨낼 때마다 어린 저에게 자긍심이 생겼습니다. 새벽에 성당에 가서 미사를 하는 건 제게 큰 자부심이었어요. 그 일을 통해 힘이 생겼습니다. 힘든 일을 이겨낼수록 제 안에 힘이 생겼습니다. 그때부터 하루 한 권씩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정 추기경은 1931년생입니다. 10살 때면 1940년대 초입니다. 일제 강점에서 아직 해방도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러니 책이 무척 귀할 때였습니다. 책은 계성초등학교 도서관에서 빌렸습니다. 밤을 새워서 그 책을 읽고 다음날 반납했습니다. 그리고 새 책을 빌렸습니다. 정 추기경은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알게 됐습니다.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걸 알게 되더군요.”  그래서 책을 더 읽었다고 했습니다.

정진석 추기경은 인터뷰에서 "어릴 적,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정진석 추기경은 인터뷰에서 "어릴 적,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무엇이었을까. 정 추기경은 『발명왕 에디슨』을 꼽았습니다. “그때는 주로 위인전을 읽었습니다.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 발명한다는 것이 멋있어 보였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꿈은 ‘발명가’였습니다. 어느새 그는 책 읽기에 중독이 됐습니다. 중ㆍ고등학생 때도 매일 한 권씩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니 학창 시절 그의 독서량은 상당했습니다.

#풍경3

정 추기경은 1950년에 서울대 화학공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여전히 그의 꿈은 ‘발명가’였습니다. 그런데 그해 6월에 한국전쟁이 터졌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지 몇 달 만에 말입니다.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날은 일요일이었습니다. 주일이었습니다. 그날 정 추기경은 서울 종로구 혜화동 성당 앞 로터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아리 쪽에서 국군 패잔병들이 내려왔습니다. 꾀죄죄한 몰골이었습니다. “지금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물었더니 “북의 탱크가 하루 만에 의정부까지 밀고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한국전쟁 때 탱크를 앞세우고 서울로 진입한 북한군. 당시 북한군은 진격을 잠시 멈추고 사흘간 서울에 머물렀다. [중앙포토]

한국전쟁 때 탱크를 앞세우고 서울로 진입한 북한군. 당시 북한군은 진격을 잠시 멈추고 사흘간 서울에 머물렀다. [중앙포토]

“왜 탱크를 저지하지 못했느냐?”고 했더니 “우리는 대전차 포가 없다. 아무리 포를 쏴도 탱크가 꿈틀하고선 다시 드르르 오더라. 그게 수백 대가 오고 있다. 저지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날 라디오에선 계속 “국군이 북진하고 있다”고 했지만, 그는 패전하고 있음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서울은 사흘 만에 인민군 세상이 됐습니다. 행여 발각되면 인민군 의용군으로 끌려가야 했습니다. 정 추기경은 숨었습니다. 한강 다리가 폭파돼 피난길도 막혔습니다. 그렇게 석 달 가까이 도피 생활을 했습니다. “그때는 어떤 심정이었느냐?”고 물었더니 정 추기경은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오늘은 내가 살아 있지만, 내일은 장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에 나오는 상황처럼 그랬습니다. 먹을 것도 없고, 이발도 못 하니 장발이었습니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어요. 잠깐 실수로 길거리에 나갔다가 인민군을 만나면 죽거나 끌려가는 거니까요.”

한국전쟁 때 서울로 진입해 들어온 소련제 북한군 탱크. 정진석 추기경은 당시 인민군에게 발각되면 인민군 보충역으로 끌려가야 하는 처지였다. [중앙포토]

한국전쟁 때 서울로 진입해 들어온 소련제 북한군 탱크. 정진석 추기경은 당시 인민군에게 발각되면 인민군 보충역으로 끌려가야 하는 처지였다. [중앙포토]

정 추기경은 6월 25일부터 두 달 넘게 서울에서 숨어지냈습니다. 9월 15일에는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습니다. 그런데 연합군이 인천에서 서울까지 진격하는 데 13일이 걸렸습니다. “그 13일 동안 인민군에게 들킨 사람은 모두 납북됐습니다.” 서울은 9월 28일에야 수복이 됐습니다.

#풍경4

서울 수복 이틀 전이었습니다. 9월 26일은 추석이었습니다. 정 추기경은 추석 전날 밤에 사촌 동생과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폭격을 맞았습니다. 서울 수복을 위해 한강을 건너오던 국군이 미아리 쪽으로 쏜 포탄이었을 겁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옆에 있던 사촌 동생의 배가 터져 있더군요. 한국전쟁 중 눈앞에서 목격한 첫 죽음이었습니다. 달이 훤한 밤이었습니다.”

정진석 추기경이 선종한지 하루가 지난 28일 새벽 명동성당에서 정 추기경 시신이 유리관에 안치된 가운데 선종미사가 진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정진석 추기경이 선종한지 하루가 지난 28일 새벽 명동성당에서 정 추기경 시신이 유리관에 안치된 가운데 선종미사가 진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그 주간이 미카엘 천사의 축일이었습니다. 사촌동생의 세례명이 미카엘이었습니다. “자신의 축일을 앞두고 죽었으니 하느님께서 데려가신 것이겠죠. 저는 그렇게 확신했습니다.” 정 추기경은 “지금도 그날은 잊을 수 없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자리가 바뀌었다면 제가 죽었겠죠. 그날 깨달았습니다. 생명은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말입니다. 저는 그날 죽었고, 덤으로 받은 삶을 사는구나. 그걸 절절하게 느꼈습니다.”

#풍경5

한국전쟁에서 겪은 전쟁의 참혹함은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해 12월 20일이었습니다. 국군은 압록강까지 진격했지만, 중공군이 밀고 내려왔습니다. 서울에 있던 청년들은 모두 창경원(지금의 창경궁)에 집합했습니다. 그리고 국민방위군을 편성해 조를 짜 피란을 시켰습니다. 이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전에 한강 다리를 끊었을 때는 서울에 남아 있던 젊은이들이 인민군 보충역으로 끌려가야 했으니까요.

정진석 추기경은 "한국전쟁 때 간만의 차이로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다. 그때 깨달았다. 나의 목숨이 나의 목숨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라고 말했다. [중앙포토]

정진석 추기경은 "한국전쟁 때 간만의 차이로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다. 그때 깨달았다. 나의 목숨이 나의 목숨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라고 말했다. [중앙포토]

국민방위군은 하루 종일 걸어서 경기도 덕소로 갔습니다. 남한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강물은 꽁꽁 얼어있었습니다. 얼음이 두껍게 언 곳을 따라 길이 나 있었습니다. 눈이 펑펑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도강 순서를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누군가의 발길질에 정신을 차렸습니다. 잠이 들면 얼어 죽으니까요. 온종일 기다리다 강을 건넜습니다. 그런데 제 바로 뒤에서 ‘우지직!’ 얼음이 깨졌습니다. 바로 뒤에 있던 사람들이 강물에 빠졌습니다. 아우성을 치면서 죽어갔습니다. 얼음에는 계속 금이 갔습니다. 사람들이 죽는 걸 빤히 보면서도 서둘러 도망가야 했습니다. 죽음은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그때 강물에 빠진 사람이 저 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건 ‘삶과 죽음’에 대한 너무나 현실적인, 너무나 실존적인 체험이었습니다. “내가 왜 안 죽었을까. 왜 나는 살아있을까.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주님, 제 삶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날부터 정 추기경은 자욱한 포탄 연기 속에서, 참혹한 삶의 끝자락에서 뼈저린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정진석 추기경은 "전쟁을 통해 죽음이 멀리 있지 않다는 걸 절절하게 알게 됐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정진석 추기경은 "전쟁을 통해 죽음이 멀리 있지 않다는 걸 절절하게 알게 됐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그 대목을 이야기할 때 정진석 추기경은 눈을 지그시 감았습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습니다. 감은 눈을 다시 떴을 때, 추기경의 눈가가 젖어 있었습니다.

〈‘내가 만난 정진석 추기경-2편’은 29일에 게재됩니다.〉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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