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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백신 풀겠다"…12시간전 "백신 봉쇄" 美 때린 文만 머쓱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미국이 여유분의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 6000만회분을 외국에 지원하기로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백신 개발국의 자국 우선주의’와 ‘강대국들의 백신 사재기’를 비판한 직후다.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 연합뉴스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 연합뉴스

젠 사키 미 백악관 대변인은 26일(현지시간) “(조 바이든)행정부가 향후 몇달 간 미국에서 생산한 AZ 백신을 공유하는 방안을 살펴보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AZ 백신이 미국 내에서 승인되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향후 몇달 간 우리의 코로나19 대응에서 이를 사용할 필요는 없다”고 설명했다. 미 식품의약국(FDA)이 향후 몇주 내에 검토를 끝내면 약 1000만회 분을 우선 배포할 수 있고, 현재 생산중인 5000만회 분 백신은 5~6월에 선적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앞서 문 대통령은 수석ㆍ보좌관 회의에서 “여유가 있을 때는 모든 나라가 연대와 협력을 말했지만 자국의 사정이 급해지자 국경 봉쇄와 백신 수출 통제, 사재기 등으로 각자도생에 나서고 있다”며 “전세계적인 백신 부족과 백신 개발국의 자국 우선주의, 강대국들의 백신 사재기”를 백신 수급난의 원인으로 꼽았다. 문 대통령은 국명을 거론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미국을 향한 비판이나 마찬가지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26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 참석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26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 참석했다. 연합뉴스

문 대통령의 발언이 나온 수보회의는 26일 오후 2시 열렸는데, 앤디 슬라빗 미 백악관 코로나19 대응팀 선임고문이 트윗에 “미국은 AZ 백신 6000만회분을 이용가능할 때 외국에 줄 것”이라고 올린 게 한국시간으로 27일 오전 2시 6분이었다. 사키 대변인이 정례 브리핑에서 이를 다시 확인한 것은 27일 오전 2시 25분이었다. 결과적으로 미국이 백신을 외국에 나눠주겠다고 공식발표하기 불과 12시간 전 문 대통령이 백신을 쥐고 놓지 않는다는 취지로 미국을 저격한 모양새가 됐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에 대해 “국제사회에서 코로나 퇴치를 위해 선진국들의 글로벌한 역할이 필요하다는 제안의 성격이 강하다”고만 설명했다. 원론적인 차원에서 글로벌 이슈인 코로나19 대응 문제를 언급한 것이라는 취지다.

靑 "코로나19퇴치 위한 선진국 역할 주문"

하지만 외교가에서는 이런 상황 자체가 의아하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문 대통령의 발언 수위를 보면 백악관의 백신 배포 계획 발표가 임박했다는 동향 자체를 정부가 사전에 파악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커 보이기 때문이다.

젠 사키 미국 백악관 대변인. 로이터=연합뉴스

젠 사키 미국 백악관 대변인. 로이터=연합뉴스

특히 사키 대변인은 백신 지원 방식에 대해 “파트너 국가들이 내는 일련의 선택지를 고려할 것”이라며 “(백신)대부분을 상대국에 직접 제공하는 방식이 될 것”이라고 답했다. 또 기존에 캐나다와 멕시코에 한 것처럼 백신을 대여할지, 무상 지원할지에 대해서도 “우리가 받아온 (백신 지원)요청을 고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미국에 백신 지원을 요청한 국가들과 1대1 백신 제공을 위해 협의를 진행하겠다는 설명이다. 한국 역시 미국에 백신을 요청한 국가 중 하나다.  
그런데 정부가 백악관의 이런 계획을 알지 못한 채 문 대통령이 직접 백신 여유국의 이기심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결과로까지 이어진 것이라면 문제가 심각하다는 지적이다. 한ㆍ미 간에 정상적인 소통과 조율이 이뤄지고 있느냐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이정도 사안은 사전 인지해야 정상"

대미 업무에 정통한 전직 고위 외교관은 “대통령이 러시아산 백신 검토까지 지시한 엄중한 상황에서 외교 라인이 백악관의 이런 동향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공개적으로 미국과의 ‘백신 스와프’까지 언급한 마당에 미국 역시 한국의 이런 급한 사정을 모를 리 없는데, 사전에 귀띔도 해주지 않았다는 뜻도 된다.
물론 현재 코로나19 방역조치로 인해 양국 당국자 간 대면 접촉이 매우 제한돼 있는 것은 사실이다. 미국의 AZ 백신 지원은 쿼드(미국ㆍ일본ㆍ호주ㆍ인도) 안보 협의체의 한 축인 인도에서 코로나19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진 데 따른 갑작스러운 결정이기도 하다.

방한한 존 케리 미국 대통령 기후특사가 17일 서울 외교장관 공관에서 정의용 외교부 장관과 만찬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방한한 존 케리 미국 대통령 기후특사가 17일 서울 외교장관 공관에서 정의용 외교부 장관과 만찬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주요 현안에서까지 한ㆍ미 간에 묘한 엇박자가 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지난 13일 일본 정부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결정 때만 해도 그렇다. 일본이 오전 8시 방류 결정을 공식 발표했는데, 불과 2시간 뒤인 오전 10시쯤 이를 지지한다는 취지의 미국 국무부 대변인 입장이 나왔다. 워싱턴은 일과 시간도 아닌 밤 9시였다.
미국이 일본을 지지할 수는 있지만, 이런 입장을 표명하는 방식이나 타이밍에서 한국에 대한 배려는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외교 소식통은 “언론사가 문의를 하면 입장을 알려주는 식의 대응도 가능했을 텐데 아예 국무부 대변인 명의로 입장을 낸 것은 한국이 사안의 민감성을 미국에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거나, 국무부가 알면서도 무시했거나 둘 중에 하나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靑, 백악관 계획 사전 인지 못했나 #한ㆍ미 소통 정상? 근본적 의문 제기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도 한·미 엇박자  

이게 끝이 아니었다. 외교부는 지난 17일 정의용 장관이 방한한 존 케리 미국 대통령 기후특사를 만나 후쿠시마 오염수와 관련해 “심각한 우려를 전달하고, 미 측이 협조해줄 것을 당부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바로 다음날 케리 특사는 기자들과 만나 “일본과 국제원자력기구(IAEA)를 신뢰한다”며 “직접 개입하지 않겠다”고 잘라 말했다. 케리 특사는 한국에 채 24시간도 머물지 않는 빡빡한 일정을 소화했는데, 출국 직전 기자 간담회를 자청해서 한 발언이었다.
이런 일련의 상황들은 한ㆍ미 동맹의 ‘기초 체력’ 자체가 약해졌다는 우려로 이어진다. 과거 정부 때는 한ㆍ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서로 상대국 정상의 발언 내용을 사전에 공유한 적도 있었지만, 현재로선 이런 긴밀한 소통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신범철 경제사회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은 “한ㆍ미 동맹을 이미 인도태평양 안보라는 큰 틀에서 보는 미국은 백신, 첨단기술, 쿼드 등을 함께 묶어 큰 그림에서 조율하자는 입장인데, 정부는 ‘쿼드 요청이 없었다’는 식으로 일관하고 있다. 불편한 논의를 피하려 방어적인 태도를 취할 수록 긴밀한 공조의 기회 역시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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