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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볏짚 태우는 냄새…돌아가신 할머니 떠오르는 위스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대영의 위스키 읽어주는 남자(117)

그녀다. 웬일로 일요일 저녁에 왔다. 인사를 하려다 왠지 어두워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닫는다. 늘 앉던 자리에 앉아 말 한마디 없이 고개를 떨군 그녀. 나도 묵묵히 내 할 일을 한다. 물수건을 건네고 물을 한 잔 따라준다. 가만히 물수건으로 제 손을 닦고, 물컵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킨다. 침묵의 시간은 그녀의 물 마시는 소리로 깨졌다.

“오늘이 저희 할머니 제사였어요.”

“그렇군요. 제사 준비하느라 힘드셨겠습니다.”

“아니요. 힘들지 않아요. 할머니에겐 죄송한 마음이 많아서요…,”

그녀는 담담히 이야기를 꺼냈다. 15살, 그녀가 중학생 때 그녀의 할머니는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당시 그녀의 가족들은 할머니의 치료를 위해 시골에 계신 할머니를 서울에 모셨다. 그녀는 사춘기 여중생. 집에 있는 할머니가 싫었다.

“그땐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암이란 게 어떤 병인지도 몰랐고, 집에 할머니가 계신 이유도 잘 몰랐어요. 부모님이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았어요. 그냥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 다니려고 우리 집에 계셔야 한다는 이야기만 들었어요. 한 달 정도 같이 지내다 병원에 입원해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 한 달은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위스키는 맥아를 건조할 때 피트를 사용한다. 피트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식물퇴적층으로 불을 붙이면 연기가 생겨나는데 그 연기로 맥아를 건조시킨다. [사진 pixabay]

위스키는 맥아를 건조할 때 피트를 사용한다. 피트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식물퇴적층으로 불을 붙이면 연기가 생겨나는데 그 연기로 맥아를 건조시킨다. [사진 pixabay]

“할머니가 성격이 좀 괴팍하셨나요? 아니면 뭐 다른 이유라도?”

“아니요. 할머니가 저를 얼마나 예뻐하셨는데요. 명절에 시골에 가면 저를 위해 특별히 과자도 만들어주셨어요. 맛동산 알죠? 맛동산이랑 모양과 색이 똑같은 과자인데, 할머니가 직접 만들어주셨거든요. 그땐 그게 좋은지도 모르고 종합과자선물세트에 있는 과자만 먹고 그랬어요. 집에 올 땐 엄청 싸주시기도 했는데, 저는 안 먹고 부모님이 다 드시기 일쑤였죠.”

“그렇군요. 뭐 일 년에 몇 번 보는 사이라면 그렇게 느낄 수 있어요. 아직 어렸잖아요.”

“제가 가장 고통스러웠던 게 뭔지 알아요? 친밀감이 부족하다거나 그런 이유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냥 저는 할머니한테서 나는 냄새가 싫었어요. 왜 아빠나 엄마한테는 나지 않는 퀴퀴한 냄새가 할머니한테 나는 건지…날 안아보려던 할머니를 몇 번이나 뿌리쳤어요.”

“그럴 수 있습니다. 한창 예민했던 시기잖아요. 아마 할머니는 그런 손녀의 모습을 다 이해하셨을 거예요. 그런 모습까지 사랑했을 겁니다.”

“아니요. 저는 지금도 너무 후회돼요. 우리 집에서 지내던 그 한 달 동안, 몇 번이고 다짐했었어요. ‘오늘은 할머니를 안아드려야지.’ 그런데 그게 막상 행동으로 옮겨지진 않더라고요. 그러다 어느 날 집에 돌아오니 할머니는 안 계셨어요. 병원에 입원하신 거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고요.”

“그렇군요… 그래도 손녀가 정성스레 할머니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보면, 할머니도 기뻐하실 겁니다. 오늘은 새로운 위스키를 한 잔 드려야겠네요.”

추수 끝나고 볏짚 태우던 냄새와 비슷한 라가블린 16년산의 피트향. [사진 pixabay]

추수 끝나고 볏짚 태우던 냄새와 비슷한 라가블린 16년산의 피트향. [사진 pixabay]

글라스에 얼음 두 조각을 띄운다. 백바에서 꺼낸 라가불린 16년을 꺼내 글라스의 반을 채운다. 차가워진 위스키는 얼음 사이에 아지랑이를 피운다.

“한잔하시죠. 라가불린 16년입니다. 오늘은 이 위스키가 어울릴 것 같네요.”

“음. 향이 독특하네요. 무언가를 태우는 듯한 향이에요. 전에 마셨던 위스키들하고는 전혀 다른데요?”

“네 그렇습니다. 이 위스키는 맥아를 건조할 때 피트를 사용해요. 피트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식물퇴적층입니다. 여기에 불을 붙이면 연기가 생겨나는데 그 연기로 맥아를 건조시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연기에서 방금 맡은 향 같은 게 나는 겁니다.”

“아! 생각났어요. 시골 할머니 댁에서 맡았던 냄새와 굉장히 닮아있어요. 아궁이에서 타들어 가던 장작에서, 불장난하러 태우던 대나무에서 이런 냄새가 났던 것 같아요. 추수가 끝나고 볏짚을 태울 때도 비슷한 냄새가 났고요.”

“맞습니다. 왠지 이 냄새를 맡다 보면 시골이 떠오르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떠오르기도 하죠. 물론 다르게 느끼는 사람들도 있지만요.”

계속 향을 맡던 그녀가 위스키를 한 모금 들이킨다. 천천히 코로 숨을 내뱉는 그녀의 얼굴에 비로소 그늘이 사라지는 것 같다.

"제가 가장 슬픈 건, 아이러니하게도 어린 시절 그토록 싫어하던 할머니 냄새를 다시는 맡지 못한다는 거예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시골집도 다 정리해버려 이런 시골에서 맡던 향도 못 느낀 지 꽤 되었는데. 이렇게 위스키로 만날지는 몰랐네요. 할머니가 보고 싶어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할머니는 원망하지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이렇게 할머니를 사랑하고 있는 손녀를 보고 얼마나 흐뭇해하실까요. 천천히 드세요. 아직 술은 많이 남아있습니다. 할머니를 사랑할 시간도요."

라가불린 16년

라가불린 16년. [사진 pixabay]

라가불린 16년. [사진 pixabay]

스코틀랜드 아일라섬 남쪽 포트엘렌 항구로부터 해안을 따라 4km 동쪽에 위치한 '라가불린(Lagavulin)' 위스키 증류소. 1816년 창업되어 블렌디드 위스키 '화이트호스(White horse)'의 원주로 많이 사용됐습니다.

라가불린 16년은 라가불린 증류소의 대표적인 싱글몰트 브랜드입니다. '12년 숙성' 위스키가 주류였을 때부터 '16년'이라는 장기숙성을 내세워왔습니다. 피트와 스모키한 느낌이 혀를 감싸듯 다가오며, 아일라 섬 몰트 위스키 중 가장 맛이 풍부하고 무게감 있다는 평을 얻고 있습니다.

위스키 인플루언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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