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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현곤 칼럼

백신, 풀리지 않는 의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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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고현곤 기자 중앙일보 편집인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정부 백신 도입 TF는 이달 초 화이자에 백신을 좀 더 빨리, 많이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화이자로부터 “우리는 과학을 하지, 외교를 하지 않는다”는 냉랭한 답이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정부는 23일 화이자와 ‘하반기 2천만 명분’을 추가 계약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7월부터 본격적으로 들어오는지, 찔끔찔끔 들어오다가 연말께 집중되는지 분명치 않다. “불확실성이 큰 상태여서 필요한 물량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어떤 것도 장담할 수 없다.”(김우주 고려대 교수)

접종률 100위권…정부 사과 안해 #대통령 인식, 왜 현실과 다른지와 #지난해 백신 놓친 경위 따져보고 #치료제에 매달린 배경도 규명해야

지난해 말 문재인 대통령이 모더나의 방셀 최고경영자(CEO)와 통화해 확보했다는 ‘5월 2000만 명분’은 기약이 없다. 홍남기 총리대행이 “하반기에 들어온다”고 했지만,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다. 미국 3차 접종으로 백신 구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방셀은 “미국에 5월 1억 회분, 7월 1억 회분을 우선 공급한다”고 발표했다. 그렇다고 모더나 백신이 하늘의 별 따기는 아니다. 이미 36개국에서 접종중이다. 우리가 미리 못 구했을 뿐이다.

아스트라제네카는 혈전 논란에도 여전히 갑이다. 백신 요청이 쇄도하자 이 회사 CEO는 외부 면담을 사절하고 있다. 노바백스 2분기 2000만 명분도 하반기로 늦춰졌다. 백신TF 관계자는 “노바백스가 벤처기업이라 행정역량이 부족해 한국에 사용승인 신청을 못하고 있어 답답하다”고 설명했다. 엉뚱하게 노바백스의 업무능력을 탓한 것이다.

훗날 백서를 쓰든, 청문회를 하든 ‘백신 후진국’을 둘러싼 몇 가지 의문점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 첫째, 문 대통령 발언이 현실과 동떨어진 이유를 따져봐야 한다. 대통령은 줄곧 “충분한 백신을 확보했다”고 자신하더니 지난주 예정에 없던 러시아 백신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갖고 있는 백신의 접종 속도를 못 내는 게 문제”라고도 했다. 백신은 있는데, 현장에서 접종이 원활치 않다는 듯 나무란 것이다. 백신을 못 구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 회원국 중 꼴찌로 접종을 시작했다. 접종률(4.4%)은 여전히 세계 100위권이다. 국민 95%가 백신 구경도 못했다. 뉴욕타임스(NYT)는 한국을 ‘굼벵이(Laggard)’에 빗댔다. 대통령이 상황을 모르거나 알면서 숨기거나. 몰라도 문제, 숨겨도 문제다.

둘째, 지난해 백신을 놓친 과정을 추궁해야 한다. 박능후 전 복지부 장관은 지난해 가을 “화이자와 모더나가 빨리 계약하자고 재촉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세균 전 총리는 “지난해 7월 확진자가 하루 100명 선이어서 백신 의존도를 높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아시아 접종률 1위(23.9%)인 싱가포르가 화이자·모더나와 계약한 그즈음이다. 두 사람 말을 종합하면 백신은 있었는데, 적극 달려들지 않았다. K방역을 과신했고, 백신을 비싸게 샀다가 문제될까 봐 주저했다는 후문이다.

백신 7900만 명분 구매 비용은 3조8000억원이다(질병관리청). 정부는 1~4차 재난지원금 51조원을 뿌렸다. 가덕도 신공항은 28조원 이상 들어간다. 이런데서 아끼고, 값을 두세 배 쳐주더라도 백신을 확보했어야 했다. 지도자 누군가가 ‘내가 책임질 테니 가격 따지지 말고 무조건 백신을 확보하라’고 했으면 될 일이었다. 리더십 공백과 무지에서 나온 오판, 보신주의가 빚은 혼란이다. TF 회의록이 남아있으니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셋째, 백신이 아닌 치료제에 매달린 점도 미스터리다. 문 대통령이 지난해 이후 여러 차례 기대감을 드러낸 치료제는 셀트리온의 렉키로나주다. 2월 식약처의 조건부 허가를 받고 3월 의료기관에 투입됐다. ‘경증의 고위험군’에 투약이 가능하다. 중증환자에게는 별 도움이 안 된다. 의료현장에선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투약 타이밍을 잡기 어렵다고 한다.

백신과 달리 치료제는 증상을 완화할 뿐 확산을 막지 못한다. 애초에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없었다. 보건의료단체연합은 “치료제에 지나친 기대를 했다. 정부가 부추긴 측면이 크다”고 지적했다. 셀트리온 서정진 회장은 지난해 11월 인터뷰에서 “치료제가 나오는 2021년 봄에는 한국이 마스크 없이 생활하는 코로나 청정국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도 거들었다. 치료제만으로 청정국가? 국민을 우롱하는 얘기다. 서 회장은 “전 세계에 백신은 충분하지만, 치료제는 부족할 것”이라고도 했다. 소신인지, 장삿속인지….

문 대통령은 취임 직후 세월호 참사를 거론하면서 “중대 재난재해의 컨트롤타워는 청와대”라고 말했다. 이 발언이 아니더라도 백신의 최종 책임은 청와대에 있다. 한·미 백신스와프 같은 설익은 애드벌룬으로 적당히 덮고 갈 상황이 아니다. 그러다가 올여름 휴가철에 집단면역 국가끼리 백신여권을 들고 여행을 다니기 시작하면? 연말이 다 되도록 우리만 마스크를 쓰고 있다면?

홍 총리대행은 “접종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 접종 계획은 처음부터 세계 100위권에 맞춰져 있고, 이 정도면 만족한다는 건가. 문 대통령은 “백신을 정치화해 막연한 불안감을 부추기지 말라”고 했지만, 안심하기에는 불확실한게 너무 많다. 백신 걱정을 하면 ‘가짜뉴스’ ‘소모적 논쟁’이라고 화만 냈지, 접종률 100위권 현실에 대해 아직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다.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