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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74세 할머니 배우 윤여정의 오스카상 쾌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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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영화 '미나리'로 제93회 아카데미영화제에서 한국인 첫 여우주연상을 받은 배우 윤여정이 '미나리'를 공동 제작한 할리우드 영화사 플랜B의 대표 브래드 피트와 함께 환하게 웃고 있다. [AP=연합뉴스]

영화 '미나리'로 제93회 아카데미영화제에서 한국인 첫 여우주연상을 받은 배우 윤여정이 '미나리'를 공동 제작한 할리우드 영화사 플랜B의 대표 브래드 피트와 함께 환하게 웃고 있다. [AP=연합뉴스]

74세 할머니 배우 윤여정이 한국 영화사에 또 하나의 큰 획을 그었다. 어제 오전(한국시간)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미나리(MINARI)’로 한국 배우 최초로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지난해 아카데미 작품상·감독상 등 4관왕에 올랐지만 아쉽게도 연기 부문 수상은 없었다. ‘미나리’ 공동제작사인 플랜B를 설립한 할리우드 톱스타 브래드 피트가 윤씨의 수상 소식을 발표해 행사장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윤씨는 수상 소감에서 “브래드 피트, 저희가 영화 찍을 때 어디 계셨냐, 정말 만나게 돼 영광”이라며 참석자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칠순 배우의 관록과 여유가 빛나는 순간이었다.

‘미나리’로 한국인 첫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도전과 집념의 56년 연기 인생 국민들 위로

윤여정의 쾌거는 배우 개인으로도, 세계 영화계 전체로도 의미가 크다. 올해로 연기 인생 56년 차를 맞은 윤씨의 집요한 열정이 지구촌 시네마의 중심인 할리우드에서 공식 인정을 받게 됐다. 아시아 여성 배우로는 ‘사요나라’(1957)의 우메키 미요시 이후 64년 만의 수상이라는 점도 주목된다. 이날 특히 중국계 미국인 클로이 자오 감독의 ‘노매드랜드’가 작품상·감독상 등 3관왕을 차지하며 지난해 ‘기생충’에 이어 아시아계 영화의 약진을 다시금 입증했다.

윤여정의 영예도 이런 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재미교포 정이삭 감독이 자전적 경험을 녹인 ‘미나리’는 한국을 떠나 미국 아칸소주의 한적한 시골에 정착하려는 한인 가족의 이야기다. 이민자 사회인 미국에서 소위 ‘아메리카 드림’을 이루려는 가난한 일가의 분투가 감동을 자아냈다. 대부분의 대사가 한국어임에도 고달픈 현실을 극복하려는 가족 간 사랑과 갈등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언어로 승화됐다. 국경·언어·민족의 간극을 이어주는 영화 매체의 역할과 잠재력을 확인시켰다. 지난해 봉준호 감독이 언급한 ‘1인치 (자막) 장벽’이 유쾌하게 허물어진 셈이다.

윤여정은 이런 ‘미나리’에 화룡점정을 찍었다. 일에 바쁜 가족들을 도우려고 한국에서 날아온 할머니 순자 역을 소화하며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작품을 밝고 경쾌하게 끌어 나갔다. ‘희생과 인내’의 전통 할머니상을 넘어 ‘유머와 익살’의 새로운 할머니상을 구현했다. 대다수 외국 언론과 평론가들이 그의 ‘귀여운(lovely)’ 할머니 연기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영화·드라마·예능 등 여러 장르를 섭렵하며 지난 반세기 정형화한 캐릭터에 안주해 오지 않는 윤씨의 집념과 끈기, 그리고 도전의식이 오스카 트로피라는 뒤늦은 보상을 받은 것이다.

윤씨는 수상 소감 말미에서 스크린 데뷔작 ‘화녀’(1971)의 김기영 감독에게도 영광을 돌렸다. 어제가 없는 그의 오늘은 없다는 뜻이다. 코로나19 우울증을 씻어준 윤씨의 아카데미 수상을 거듭 축하한다. 윤여정은 ‘이제, 다시’ 새로운 출발선에 서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