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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아시아에서 온 두 여성을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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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25일(현지시간)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중국 감독 클로이 자오가 제작을 겸한 영화 ‘노매드랜드’가 차지한 세 부문 중 여우주연상(프랜시스 맥도먼드)을 뺀 작품상·감독상 트로피를 들고 웃었다. 그는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역대 두 번째 여성이다. 아시아 여성으론 최초다. [로이터=연합뉴스]

25일(현지시간)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중국 감독 클로이 자오가 제작을 겸한 영화 ‘노매드랜드’가 차지한 세 부문 중 여우주연상(프랜시스 맥도먼드)을 뺀 작품상·감독상 트로피를 들고 웃었다. 그는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역대 두 번째 여성이다. 아시아 여성으론 최초다. [로이터=연합뉴스]

“일이 힘들 때마다 중국에서 자랄 때 아빠와 하던 게임을 생각합니다. 중국 시어를 외우고 서로 문장을 끝내주는 게임인데 지금도 기억에 남는 시의 첫 구절이 ‘사람들이 태어날 땐 선하다(人之初, 性本善.)’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큰 영향을 받았고 아직도 저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가끔 살다 보면 믿기 어려운 순간들이 있지만, 그래도 제가 만난 모든 사람의 내면에서 선함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오스카상을 믿음과 용기를 갖고 자신의 선함을 유지하는 모든 분께 돌리고 싶습니다.”

‘노매드랜드’의 클로이 자오 #아시아 여성으로 첫 감독상 #윤여정과 함께 변화의 상징 #중국, 자오 뉴스 실시간 삭제

영화 ‘노매드랜드’로 아카데미 시상식 역대 첫 아시아 여성 감독상 수상자가 된 중국 감독 클로이 자오의 말이다. ‘허트 로커’의 캐서린 비글로 감독이 2010년 여성으론 사상 최초 감독상을 거머쥔 지 11년 만이다. 아시아계로는 대만의 이안(‘브로크백 마운틴’ ‘라이프 오브 파이’ 2회), 한국의 봉준호(‘기생충’)에 이어 4번째.

‘노매드랜드’는 동명 논픽션을 토대로 2008년 미국 금융위기 여파로 떠돌이 생활에 내몰린 현대판 유목민(노매드·Nomad)의 삶을 다큐멘터리처럼 담아낸 극영화. 중국에서 태어나 영국·미국에서 살아온 자오 감독의 세 번째 장편이다. 선댄스영화제 초청 데뷔작 ‘내 형제가 가르쳐준 노래’, 칸영화제 감독주간 초청작 ‘로데오 카우보이’에 이은 작품이다. 공동 제작을 겸한 프랜시스 맥도먼드의 여우주연상에 이어 작품상까지 3관왕에 오르자 자오는 린다 메이, 스웽키 등 영화에 출연한 실제 노매드들과 무대에 올라 “길 위에 사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한다. 진정한 친절함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셨다”고 했다.

여든 넷 영국 배우 안소니 홉킨스는 치매 노인으로 분한 영화 ‘더 파더’로 최고령 남우주연상을 받았지만 시상식엔 불참했다. [AFP=연합뉴스]

여든 넷 영국 배우 안소니 홉킨스는 치매 노인으로 분한 영화 ‘더 파더’로 최고령 남우주연상을 받았지만 시상식엔 불참했다.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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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현지시간) 미국 LA 유니온스테이션에서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클로이 자오, 윤여정 등 아시아 여성의 진격이 돋보였다. 작품상·감독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올랐던 ‘미나리’는 여우조연상 수상에 그쳤다.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말이 들려왔다. 지난해 ‘기생충’으로 비영어 영화 최초 작품상 등 4관왕을 가져갔던 봉준호 감독은 한국에서 찍은 영상을 통해 감독상 시상자로 나섰다. 봉 감독은 “길에서 어린 아이를 붙잡고 감독이란 무엇인가 20초 안에 설명한다면 뭐라고 할 건가”란 질문을 후보 감독들에게 던졌고, “영화는 삶에 대한 응답이어야 한다”(‘미나리’ 정이삭) “어떤 하나의 신을 찍을 땐 수백 가지 방법이 있지만 결국 맞는 방법과 틀린 방법,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된다”(‘맹크’ 데이비드 핀처) 등의 답변을 한국말로 전해 영어 자막이 뜨게 하는 진풍경도 펼쳐냈다.

시상식을 주관하는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는 2016년 아카데미 시상식 연기상 부문에 비백인 배우가 단 한명도 지명되지 않으며 ‘#오스카는 너무 하얗다(OscarsSoWhite)’는 비판 운동이 펼쳐지자 이후 투표권을 가진 회원 명단의 다양성 확보에 힘써온 바다. 올해는 그런 노력이 다양한 부문에서 어느 때보다 빛났다.

남우조연상을 받은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의 다니엘 칼루야, 음악상의 ‘소울’ 재즈 음악가 존 바티스트 등이 수상 소감에서 흑인 생존권 등을 강조한 데 더해 코로나19 속 자선활동으로 진 허숄트 박애상에 호명된 영화감독 타일러 페리는 “아이들에게 증오를 거부하라는 가르침을 주고 싶다. 멕시코인이라서, 흑인이라서, 백인이라서, 성 소수자라서, 경찰이라서, 아시아인이라서 증오하는 것을 멈추라”고 호소했다.

올해 수상 결과에 대해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는 “아카데미는 오래된 쇼지만 사회적 요구에 맞물려 심사위원들의 변화를 추구하며 (지난해 ‘기생충’으로) 언어적 장벽을 무너뜨렸고 올해는 아시아에서 온 두 여성(윤여정, 클로이 자오)을 영화제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면서 “‘노매드랜드’ ‘미나리’ 둘 다 미국 사회를 떠도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아카데미가 계급적·인종적 약자인 아시아 여성, 할머니에게 트로피를 쥐여준 것은 단지 미국 사회의 반영을 넘어서 변화를 촉구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오스카의 상징을 권위와 전통에서 변화와 혁신으로 바꿔가려는 게 아닌가”라고 분석했다.

한편 매년 개최해온 LA 돌비극장이 아닌 유니온스테이션에서 수상자, 시상자 등을 최소화해 대면 진행된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은 ‘노매드랜드’의 프란시스 맥도먼드가 안았다. ‘파고’ ‘쓰리 빌보드’에 이어 세 번째 수상이다.

제93회 아카데미상 주요 부문 수상 결과

제93회 아카데미상 주요 부문 수상 결과

남우주연상은 유력시됐던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의 고(故) 채드윅 보스만이 아닌 ‘더 파더’의 안소니 홉킨스가 여든넷의 나이로 역대 최고령 기록을 세우며 수상했다. 1992년 ‘양들의 침묵’으로 첫 남우주연상을 차지한 지 29년 만이다. 각본상은 배우이기도 한 에메랄드 펜넬 감독의 여성 복수극 ‘프라미싱 영 우먼’이, 각색상은 프랑스 극작가 겸 연출가 플로리 안젤러 감독이 치매 노인의 혼란을 그려낸 ‘더 파더’가 차지했다.

시상식 중 상영된 영화인 추모 영상에는 지난해 12월 코로나19로 숨진 김기덕 감독의 얼굴이 비치기도 했다. 김 감독은 2017년 CJ 이미경 부회장, 정정훈 촬영감독 등과 더불어 아카데미 신규 회원으로 위촉된 바 있다.

한편 이날 클로이 자오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쓸었지만, 그의 모국 중국내에선 수상 소식이 검열되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보도했다. 웨이보 등에 자오의 수상 소감 동영상과 기사, 축하 댓글 등이 올라왔지만 실시간 삭제됐다는 것.

국영방송사인 CCTV 등도 시상식 소식을 일체 보도하지 않았다. CCTV가 아카데미 시상식 중계를 하지 않은 건 2003년 이후 처음. 자오 감독이 지난 3월 골든글로브 감독상을 받을 때만 해도 중국 언론들은 ‘중국의 자존심’이라며 그를 추켜세웠다. 하지만 2013년 미국 영화잡지 ‘필름페이머’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을 “사방에 거짓말이 널려있는 곳”이라고 말한 사실이 알려진 뒤 분위기는 급반전했다. “중국인이냐, 미국인이냐”는 네티즌들의 비아냥도 쏟아졌다. 지난 23일 예정됐던 중국 내 개봉도 연기됐고, 주요 영화 웹사이트에선 노매드랜드 소개 글이 삭제됐다.

자오 감독이 이날 중국어 시구를 인용한 것도 이런 여론을 의식했다는 분석이다.

나원정·이민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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