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세대 노조가 온다, 586 정년연장 맞서 “공정한 보상을”

중앙일보

입력 2021.04.27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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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현대케피코 연구원으로 일하는 이건우씨( 오른쪽)가 주축이 된 현대차그룹 연구사무직 노조가 26일 서울고용노동청에 설립 신고를 했다. 김영민 기자

현대케피코 연구원으로 일하는 이건우씨( 오른쪽)가 주축이 된 현대차그룹 연구사무직 노조가 26일 서울고용노동청에 설립 신고를 했다. 김영민 기자

26일 서울고용노동청에 현대차그룹 사무연구직 노조 설립 신고서를 제출한 이건우(27)씨는 1994년생이다. 이씨는 현대차 계열사인 현대케피코에서 근무한다. 이 회사는 자동차용 각종 전자제어장치를 연구개발한다. 지난해 상반기(1~6월)에 입사한 그는 매일 수원에서 군포까지 출퇴근하며 자동차용 전자제어시스템 개발 업무를 맡고 있다. 이씨는 “부모님께도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노조가 관심을 갖지 않는 사무연구직도 공정한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다”고 나지막이 말했다. 투쟁과 파업을 외치던 ‘1980년대 운동권’ 노조위원장과는 사뭇 달랐다.

대기업 사무직 노조 결성 잇따라
현대차 27세, LG전자 30세 위원장
운동권 노조와 달리 SNS로 뭉쳐
공정한 고과, 52시간제 준수 요구

최근 대기업에서 사무직 노조 설립을 주도하는 계층은 1990년대생이다. 현대차에 앞서 LG전자 사무직 노조를 결성한 유준환(30)씨도 91년생 연구직이다. 현대중공업도 20~30대 사무직 근로자 약 700명이 모여 최근 단체 채팅방을 만들고 선전물을 배포했다. 90년대생을 축으로 한 MZ세대가 586세대(50대, 80년대 학번, 60년대생) 위주의 기업·사회 문화에 도전하는 양상이다. MZ세대는 198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와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출생한 Z세대를 일컫는다.

현대차 사무직 노조에는 현재 약 500명의 직원이 가입 의사를 밝혔다. 대부분이 8년 차 미만 사원~대리급(매니저) 직원이다. 여기에 과장급(책임매니저) 이상 사원도 일부 가입 의사를 전달했다. 현행 노조법에 따르면 노조 설립은 허가제가 아닌 신고제다. 특별한 반려 사유가 없다면 모두 승인하는 것이 원칙이다. LG전자 사무직 노조의 경우 현재 3500명 이상이 가입돼 있다.

대공장 문화의 균열, MZ 사무직 노조 현황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대공장 문화의 균열, MZ 사무직 노조 현황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MZ세대의 새 노조는 익명 애플리케이션(앱) ‘블라인드’, 네이버 ‘밴드’ 등 비대면 수단으로 의사소통을 한다. 공장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라인을 멈춰세우는 방식으로 실력 행사를 했던 생산직 노조와는 문화 자체가 다르다. 현대차그룹 사무직 노조 설립 자문을 맡은 김경락 노무사(대상 노무법인)는 “서로 다른 계열사 직원들이 오직 온라인으로 자발적 지원 과정을 거쳐 노조 집행부를 만들었다”며 “집단을 강조하지 않고, 개개인이 실시간으로 자유롭게 소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정한 보상, 연공서열제 거부, 52시간제 준수 등은 MZ세대 사무직의 핵심 요구조건이다. 특히 이들은 한국식 연공서열 문화에 반감을 나타내고 있다. 현대차의 한 사무직 직원은 블라인드에 “회식 참석, 상사와의 친분으로 고과를 배분하는 일이 아직도 비일비재하다. 사내정치, 노사 네고(협상)가 아니라 당해연도 성과를 놓고 공정하고 정확하게 평가받자”고 적었다. ‘65세 정년연장’을 놓고도 50대가 주축인 현대차 생산·정비직은 상당수가 찬성하지만, 20~30대 연구·사무직은 대다수가 반대하고 있다.

현대차 직군별 인력 비중.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현대차 직군별 인력 비중.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업무 시간과 여가의 분리(워라밸)도 신세대 노조의 주요 요구사항이다. 유준환 LG전자 사무직 노조 위원장은 “퇴근시간 이후 카카오톡으로 잔업을 지시하는 관행은 바뀌어야 한다. 개인시간 보장을 위해서라도 개인용 메신저와 업무용 메신저는 분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비제조업 기반인 네이버·카카오의 경우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을 벤치마킹해 기업용 메신저로 업무 연락을 한다.

현대차그룹 사무직 노조의 경우, 기업 단위를 넘어 ‘지식노동자 기반 산별노조’ 결성도 계획하고 있다. 현대차그룹과 LG전자·금호타이어 등 개별 기업의 사무직 노조가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방식이다. 이에 따라 민주노총·한국노총 등 기존 상위 노조와 완전히 다른 ‘제3 산별노조’가 등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이건우 현대차그룹 사무연구직 노조위원장은 “사무·연구직 노동자에 대한 공정하고 객관적인 보상 시스템, 근로환경 개선이 필요해 노조 설립을 결심했다”며 “30대 책임급 직원이 주축이 되겠지만, 굳이 연령대 제한을 두지 않고 조합원 가입을 받겠다”고 말했다.

‘2030세대’ 신노조의 출현은 2018년 11월 『90년생이 온다』가 출간된 지 3년 만이다. 저자 임홍택씨는 책에서 “80년대생과 90년대생은 동일한 마음을 갖지만, 다소 차이가 있다. 80년대생은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을 굳이 표출하지 않지만, 90년대생은 말한다는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앞 세대(80년대생)와 비교해도 90년대생은 더욱 과감한 방식으로 공정한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는 취지다.

제조업에 기반해 성장했던 한국 대기업은 세대 전쟁 속에서 양자택일 상황에 놓였다. 같은 파이를 놓고 정년 연장을 주장하는 586세대와 공정한 보상을 원하는 90년대생 모두의 이해관계를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권순원(경영학부) 숙명여대 교수는 “한국 대기업이 ‘대공장 제조업’ 문화를 바꾸지 않고선 지속 가능한 성장이 불가능한 상황에 내몰렸다”며 “젊은 세대가 원하는 공정한 보상, 성과에 따른 평가 등을 받아들여야 향후 생존이 가능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김영민 기자 brad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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