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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난 팜므파탈 윤여정, 대본에 '…'만 있어도 미친 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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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배우 최초 미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거머쥔 배우 윤여정. [사진 후크엔터테인먼트]

한국배우 최초 미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거머쥔 배우 윤여정. [사진 후크엔터테인먼트]

연기인생 56년차, 일흔넷 윤여정이 한국 배우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차지했다. 재미교포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영화 ‘미나리’의 할머니 같지 않은 한국 할머니 순자 역할로다. 1980년대, 미국에 이민간 딸(한예리)의 가족을 찾아간 순자는 낯선 아칸소 시골 개울가에 한국 미나리씨를 심는 토종 할머니지만 번뜩이는 재치와 솔직함이 남다르다.
“뻑났다. 비켜라, 이놈아!” 미국 매체 버라이어티가 윤여정을 올해 오스카상감에 일찌감치 점찍으며 꼽은 명대사다. 영어 자막도 한국말 비속어(뻑‧bbuk)를 그대로 살린 “It’s a bbuk all you bastards!”. 어린 손자 데이빗(앨런 김)과 화투를 치며 여느 할머니답지 않게 승부에 몰두한 순자의 추임새가 미국인들 눈에도 재미났던 모양이다. “국민 엄마는 되고 싶지 않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온 윤여정은 생애 첫 출연한 미국 영화 속 한국 할머니 역마저도 자기답게 평정했다.

연기 56년차 한국배우 최초 오스카 수상 #이혼 후 비호감 1위 벗으려 노력 또 노력 #국민엄마 안 하니 '투 상수'와 칸 단골 돼 #"지나보니 단점이 장점, 장점이 단점이죠"

'국민 엄마' 거부…닮은꼴 없는 배우

한국계 미국인 리 아이작 정(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영화 '미나리'의 한 장면. 왼쪽부터 스티븐 연, 앨런 S. 김, 윤여정, 한예리, 노엘 게이트 조. [사진 판씨네마]

한국계 미국인 리 아이작 정(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영화 '미나리'의 한 장면. 왼쪽부터 스티븐 연, 앨런 S. 김, 윤여정, 한예리, 노엘 게이트 조. [사진 판씨네마]

윤여정은 뭐든 ‘전형적인’ 것은 거부해온 배우다. 국내외 어디서도 비슷한 계보를 찾기가 어렵다. ‘미나리’로 미국 방송이 그를 “한국의 메릴 스트립”에 빗댔을 때 갸웃거리는 반응이 더 많았던 까닭이다.
그는 데뷔부터 남달랐다. 초등학교 양호교사였던 어머니는 그가 열 살 무렵 남편을 여의고 홀로 세 딸을 키웠다(LG 첫 여성 임원을 지낸 윤여순 전 LG아트센터 대표가 윤여정의 막내 여동생이다). 맏딸 윤여정은 뭐든 어머니를 기쁘게 하고 싶었지만 당신의 꿈이었던 의사만은 이루지 못했다. 지망한 대학에 떨어져 한양대 국문과에 가게 되자 그는 직접 등록금을 벌기 위해 TBC 방송국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사회자에게 선물을 전달하는 단순 보조였지만 그를 눈여겨본 주변 권유에 대학 1학년 재학 중이던 1966년 TBC TV 탤런트 공채에 도전했고 덜컥 합격하며 데뷔했다.

오란씨걸 하차시킨 '장희빈' 팜므파탈

1971년 인기에 힘입어 윤여정은 음료수 '오란씨'의 첫 광고 모델로 활약했다. [제공 동아오츠카]

1971년 인기에 힘입어 윤여정은 음료수 '오란씨'의 첫 광고 모델로 활약했다. [제공 동아오츠카]

개성 강한 외모와 톡톡 튀는 말투. 타고난 끼는 봄꽃처럼 만개했다. 1967년 드라마 ‘미스터 곰’에서 신인탤런트상을 타며 스타덤에 올랐고, MBC 이적해 71년 주연 드라마 ‘장희빈’에선 표독스러운 장희빈으로 변신해 열연했다. 분노한 시청자들이 벽에 붙은 얼굴 사진마다 눈에 구멍을 뚫는 통에 첫 모델로 발탁됐던 ‘오란씨’ 음료광고에서 이듬해 잘렸다고 스스로 회고했을 정도다. “나쁜 년 잡으라”며 방송국에 뛰어든 남성을 당시 숙종 역의 배우 박근형이 막아준 해프닝도 있었다.
팜므파탈 이미지는 같은 해 스크린 데뷔작 ‘화녀’로 이어졌다. 김기영 감독이 자신의 대표작인 흑백영화 ‘하녀’(1960)를 컬러로 재해석한 영화다. 윤여정은 시골에서 상경해 식모살이하던 집의 유부남(남궁원)과 기이한 외도 끝에 파국에 이르는 명자를 연기해 시체스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대종상 신인상 등을 차지했다. 한양대 은사 박목월 시인에게 수필 실력을 칭찬받기도 했던 그를, 김 감독은 “내 말을 이해한 유일한 배우”라며 신임했다. 계단을 구르고 맨손으로 생쥐를 잡는 고생스런 장면 탓에 영화라면 학을 뗐던 윤여정은 이듬해 영화 ‘충녀’에서 한층 괴이한 팜므파탈이 되어 김 감독과 재회했다.

복귀 후 '이혼' 주홍글씨, 목소리 거부감 1위  

1971년 MBC '장희빈'에서 장희빈을 연기한 윤여정(가운데). [사진 MBC]

1971년 MBC '장희빈'에서 장희빈을 연기한 윤여정(가운데). [사진 MBC]

1970년대 중반 가수 조영남과 결혼한 그는 미국에 건너가 두 아들을 낳으며 은퇴하는 듯했지만 이혼 후 13년 만에 귀국하며 생업전선에 나섰다. 미국에서 최소 시급 2.75달러짜리 슈퍼마켓 점원으로 일해선 먹고 사는 데 답이 안 나왔다고 했다. ‘이혼’ 딱지가 주홍글씨 같던 시절, 한국에서 배우로 복귀한 그는 환영받지 못했다. ‘시청자 거부감 1위’란 꼬리표가 붙었다. “배우 그만두려고 했다. 내가 뭐 잘못한 것도 아니고 타고난 목소리 가지고 뭐라고 하는 게 인권유린 같았다”고 2013년 SBS 토크쇼 ‘힐링캠프’에서 고백하기도 했다. 하지만 좌절보단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굳은살이 박였단다.
이후 조‧단역을 가리지 않고 연기했다. 오랜 우정 김수현 작가의 ‘사랑과 야망’ ‘작별’ ‘목욕탕집 남자들’ 등 TV 히트작에 연달아 출연했고, 시청률이 60%를 넘나든 MBC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1991)에선 사회적 성공 대신 결혼을 택하려는 딸(하희라)에게 “널 확실하게 빛내면서 살라”며 설득하는 엄마가 됐다. ‘모래성’ ‘원미동 사람들’ ‘넝쿨째 굴러온 당신’ ‘굳세어라 금순아’ 등 드라마를 통해 시대에 녹아들되 할 말은 하는 어머니‧할머니를 두루 거쳤다면, 영화는 보다 강렬했다.

'하하하' '하녀' 칸 더블 초청 '투 상수' 전성시대

2012년 영화 '하하하'로 칸영화제 공식 경쟁 부문에 초청된 (왼쪽 두 번째부터) 배우 문소리, 홍상수 감독, 배우 이자벨 위페르, 유준상, 윤여정이다. [AFP=연합뉴스]

2012년 영화 '하하하'로 칸영화제 공식 경쟁 부문에 초청된 (왼쪽 두 번째부터) 배우 문소리, 홍상수 감독, 배우 이자벨 위페르, 유준상, 윤여정이다. [AFP=연합뉴스]

박철수 감독의 ‘어미’(1985)에선 인신매매 당한 충격으로 딸이 자살하자 복수에 뛰어든 비정한 엄마가 됐다. 임상수‧홍상수 감독과 만나며 윤여정은 ‘투 상수’의 페르소나로 새 전성기를 맞는다. 톡 쏘는 직설화법의 화력은 더했다. 임 감독의 ‘바람난 가족’(2003)에서 시한부 남편을 두고 늦바람 난 병한이 되어 며느리(문소리)에게 “나 요즘 생전 첨 오르가슴이라는 걸 느껴”라고 천연덕스레 고백하고, 임 감독이 김기영 감독의 동명 영화를 재해석한 ‘하녀’에선 “아더매치(아니꼽고 더럽고 매스껍고 치사하다는 뜻의 유행어)”한 세상에 기생하는 늙은 하녀 병식 역할로 대종상‧춘사영화상‧대한민국영화대상‧시네마닐라영화제‧아시안필름어워드 등 2010년 여우조연상을 싹쓸이했다.
그해 홍 감독과 통영에서 찍은 ‘하하하’와 ‘하녀’로 그는 한해에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두 편의 영화로 초청되기도 했다. 2년 뒤엔 임 감독의 ‘돈의 맛’에서 필리핀 하녀와 바람난 남편에 맞서 젊은 남자(김강우)를 돈으로 탐하는 재벌가 안주인이 되어, 그해 프랑스 배우 이자벨위페르와 함께한 홍 감독의 ‘다른 나라에서’와 더불어 또 다시 칸 경쟁부문에 두 편이 나란히 진출했다.

노희경 "'…'만 있어도 그녀는 미치게 연기해낸다"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화녀'에서 왼쪽부터 주연 남궁원과 윤여정. [중앙포토]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화녀'에서 왼쪽부터 주연 남궁원과 윤여정. [중앙포토]

노희경 작가가 “지문 하나 없이 ‘…’만 있어도 그녀는 미치게 연기를 해낸다”(에세이집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고 표현한 윤여정이다. 그런 노련함은 2016년 이재용 감독의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얼떨결에 외로운 노인들의 자살을 돕게 되는 성매매 여성 소영 역할로 그는 데뷔 50주년을 맞은 그해 캐나다 판타지아영화제 슈발누아경쟁-여우주연상, 아시아태평양스크린어워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이듬해엔 한국 문화예술계에 헌신한 공로로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지나고 보니 단점이 장점이고 장점이 단점이죠. (전형적인) 어머니 역할을 안 해서 임상수 감독(‘하녀’)한테 뽑혔을 거고 이재용 감독 영화 ‘여배우들’도 할 수 있었어요.” 11년 전 ‘하하하’ 개봉 당시 인터뷰에서 그의 말이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의 이재용 감독과 소영 역의 배우 윤여정. [사진 CGV아트하우스]

영화 '죽여주는 여자'의 이재용 감독과 소영 역의 배우 윤여정. [사진 CGV아트하우스]

“내가 모르는 삶을 들여다보고 싶다”고, “최선을 다하는 후배들을 보면 같이하고 싶다”고 자주 말해온 그는 최근 나영석 PD 사단 예능 ‘꽃보다 누나’ ‘윤식당’ ‘윤스테이’와 김초희 감독의 독립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등에서 그 바람을 마음껏 누리는 중이다.
앞서 이재용 감독의 페이크 다큐멘터리 ‘여배우들’(2009)에서 한류 스타 후배들에게 “난 재래시장이나 지킬게” 했던 윤여정. 이미 워쇼스키 감독의 넷플릭스 드라마 ‘센스8’(2015)에서 배두나와 영어 대사로 호흡 맞춘 데 이어 ‘미나리’로 미국에서 떠오르는 배우가 됐다. 차기작은 재미교포 이민진 작가의 애플TV 미국 드라마 ‘파친코’. 임상수 감독의 지난해 칸영화제 공식 선정작 ‘헤븐: 행복의 나라로’(가제)도 개봉을 기다린다.

팟캐스트 '배우 언니'에서 집중 조명한 '미나리' 윤여정 미국서 난리난 이유 오디오로 바로 듣기(https://www.joongang.co.kr/JPod/Episode/468). [사진 배우 언니]

팟캐스트 '배우 언니'에서 집중 조명한 '미나리' 윤여정 미국서 난리난 이유 오디오로 바로 듣기(https://www.joongang.co.kr/JPod/Episode/468). [사진 배우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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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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