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9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국민의힘 지도부가 연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의 팔순 잔치가 한창이었다. 오후 6시 무렵 ‘박원순 서울시장 실종’이란 뉴스 속보가 떴다. 이후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참석자들은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들을 주고받았다. 걔 중엔 “보궐선거 이기고 대선까지 잡자”는 말도 나왔는데, 이를 들은 김 위원장은 “하늘이 준 기회는 맞는데 독이 될 수도…”라며 말끝을 흐렸다고 한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한 인사는 이런 얘기를 기자에게 전하면서 “한참 지나 ‘그때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재보선 승리가 당 개혁을 더디게 해 대선에 외려 독이 될 수 있다’고 하더라. 뜬금없는 소리 같았는데 요즘 당 상황을 보면 알 것도 같다”고 덧붙였다.
제1야당 재보선 이긴 뒤 더 혼란 #당 개혁 실종, 당권 놓고 이전투구 #초선들 “영남당 안 돼” 세대교체론 #친박계 일부 탄핵부정 발언 시끌 #대선 인물난에 윤석열 영입 목매 #일부선 “검증 필요, 플랜B 세워야”
김 전 위원장의 예견이 옳았던 걸까. 그의 말처럼 국민의힘은 정말 승리의 역설에 빠진 걸까. 내부 충돌부터 퇴행 논란,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둘러싼 파열음까지 제1야당의 난맥상을 이슈별로 짚어봤다.
①영남당 회귀와 초선 vs 중진 충돌
김 전 위원장이 떠난 후 당 내 세력들간 이합집산과 경쟁이 거칠게 진행되고 있다. "또 영남당으로의 회귀냐"는 비판의 표적이 되고 있는 대구 출신 주호영 당 대표 권한대행은 전당대회 당 대표 경선 출마 여부를 아직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그 사이 초선 의원들이 세대교체론으로 치고 나섰다. 당 소속 101명 의원 중 초선 의원은 56명으로 과반이다. 지난 8일 초선 의원 42명은 “우리 당은 특정 지역 정당이 아니다”는 성명을 냈고, 최근 들어선 '초선 대표론'을 구체화하려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김 전 위원장도 당 밖에서 “초선 당 대표로 새로운 모습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거들고 있다.
이에 주 대행은 “영남 정당의 한계가 무엇인지 모르겠다”(9일 당 회의 후)고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30일 열릴 차기 원내대표 선거를 영남(김기현) vs. 비영남(권성동·김태흠·유의동)의 구도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이를 두고 일각에선 “영남 죽이기”라며 배후설을 제기한다.
영남당 논쟁은 국민의힘에선 해묵은 이슈인데, 중요한 순간에 또 당내 권력투쟁의 테마로 등장했다. 익명을 원한 재선 의원은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당내 갈등이 특정 계파나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문제지만 이 정도의 논쟁은 필요하다”고 옹호했지만, 당 안팎의 시선은 곱지 않다.
②“탄핵” 퇴행 논란
재보선 승리 후 일부 친박계를 중심으로 ‘탄핵 부정론’이 제기되면서 “당이 강경 보수층에 휘둘리던 과거로 퇴행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커지는 중이다. 당 최다선(5선)인 서병수 의원이 지난 20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당할 만큼 위법한 짓을 저질렀느냐”고 한 게 발단이 됐고, 일부 의원이 동조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바로 그 이튿날 오세훈 서울시장과 박형준 부산시장이 문재인 대통령과 오찬을 하면서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면을 요청하면서 당 내부가 ‘사면·탄핵’ 논쟁으로 들썩거렸다.
당의 다수는 사면엔 원칙적으로 찬성하면서도 문재인 대통령이 결단해야 할 사안이라는 입장이다. 탄핵에 대해서도 “사법적 판단이 끝난 만큼 이를 부정해봐야 ‘도로 한국당’이란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다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온정주의적 시각이 강한 영남을 중심으로 "과연 탄핵당할 만큼 잘못 했느냐"는 정서 또한 존재한다. 당 지도부는 “탄핵 부정 발언은 당 전체 의견으로 보기에 무리가 있다”(주 대행)고 선을 그었지만, 불씨는 여전하다.
③윤석열 두고 내전
야권의 유력 대선 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구애 일변도라는 지적이 많다. 새 원내대표 후보군과 차기 당 대표 주자들도 대체로 ‘윤석열 영입’을 공약의 우선순위로 뒀다. 김기현·조해진 의원은 서울법대 선후배 사이라는 점을, 권성동 의원은 검사 때 같이 근무한 인연을 내세우며 영입을 자신하고 있다.
정작 윤 전 총장 본인은 지난 3월 사임 후 정치적 발언이나 입장 표명을 극도로 삼가고 있다. 이에 당 일각에선 섣부른 기대 대신 ‘플랜 B’를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러다 윤 전 총장이 불출마나 중도 사퇴라도 하면 어찌할 거냐”는 것이다. 당 대표에 출마하는 김웅 의원은 통화에서 “당이 처절한 개혁 방안은 내놓지 않고 또 윤석열이라는 외부 인사의 피를 빨면서 기생하려 한다”며 자강론을 주장했다.
이런 가운데 당내에선 ‘윤석열 선 검증’ 주장도 제기됐다. 야권 대선 주자가 되면 더불어민주당이 집중 공격을 할 게 뻔한데, 그에 앞서 검증하자는 주장이다. 이와 관련해 김용판 의원은 최종 무죄로 판결 난 2013년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과 관련해 당시 수사를 지휘한 윤 전 총장이 입장을 밝힐 것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준비 중이다.
④커지는 원심력
이러는 사이 야권 통합 내지 재편을 둘러싼 원심력이 점점 커지고 있다. 당장 재보선 직후 속전속결로 될 것 같던 국민의당과의 합당 논의가 지지부진하다. 주 대행은 이날 대한의사협회 정기대의원총회 참석 후 기자들과 만나 "순리대로 하면 된다"며 합당을 급하게 진행하지는 않겠다는 뜻을 시사했다. 국민의당 또한 국민의힘 차기 지도부와 합당을 논의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여기에 금태섭 전 의원은 최근 “제3지대에서 윤 전 총장을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틀이 필요하다”며 신당 창당의 뜻을 내비친 뒤, 곧이어 김 전 위원장과도 회동했다. 특히, 김 전 위원장이 이미 윤 전 총장과 몇 차례 접촉을 시도했다는 복수의 전언이 이어지면서 김 전 위원장에게 야권 재편의 주도권을 빼앗길까 우려하는 국민의힘 내부 기류도 감지된다.
현일훈 기자 hyun.ilho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