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

"알래스카 오면 공짜입니다" 백신 남아도는 美 '백신 행사'

중앙일보

입력 2021.04.26 00:31

업데이트 2021.04.26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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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박현영 기자 중앙일보 워싱턴특파원
미국 뉴욕시는 23일부터 자연사박물관에 '워크인(walk-in)' 코로나19 백신 접종소를 열었다. 예약없이 불쑥 들어가도 백신을 맞을 수 있다. [AFP=연합뉴스]

미국 뉴욕시는 23일부터 자연사박물관에 '워크인(walk-in)' 코로나19 백신 접종소를 열었다. 예약없이 불쑥 들어가도 백신을 맞을 수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 14일 미국 워싱턴 DC 7번가에 있는 대형 마트인 ‘자이언트’. 카페였던 한쪽 코너에 흰색 가림막이 설치됐다. 마트 내 약국이 코로나19 백신 접종소로 변신한 것. 오후 4시가 되자 약사가 나와 줄 선 이들을 향해 외쳤다. "7명 맞을 수 있습니다."

[박현영의 워싱턴 살롱]
연방정부, 체류자격 제한 안 해
5월 백신 공급이 수요 초과 전망
집단 면역, 관광 활성화에 도움
알래스카, 6월부터 백신관광 시작

예약자에게 주사를 놓고 남은 백신으로 7명에게 접종할 수 있다는 뜻. 줄을 선 사람은 8명이었다. 연령과 직업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예약이 안 되지만 백신을 빨리 맞고 싶은 사람들이 문 닫는 시간에 맞춰 모여들었다.

나이·직업·기저질환 등을 확인한 뒤 우선순위에 따라 1명을 제외한 7명이 모더나 백신을 맞았다. 현장에서 만난 여성 마리앤은 "나는 65세가 안 돼 현재 대상자가 아니지만 백신을 빨리 맞고 싶어 남편이 2차 접종하러 올 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따라왔는데 성공했다"고 말했다.

미국은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 후 92일 만에 코로나19 백신 2억 회분을 접종했다. [EPA=연합뉴스]

미국은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 후 92일 만에 코로나19 백신 2억 회분을 접종했다. [EPA=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코로나19 백신을 낭비하지 않으면서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빠른 속도로 접종하겠다는 일념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 덕분에 바이든 대통령 취임 후 92일 만에 총 백신 2억 회분을 주사했다. 미국 성인 절반 이상(53%)이 1회 이상 접종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접종 속도가 확연히 느려졌다.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꾸준히 늘던 일평균 접종 수는 4월 13일 338만 회분에서 정점을 찍은 뒤 감소 추세다. 4월 23일 286만 회분까지 떨어졌다. 맞으려는 사람은 대부분 맞았고, 남은 사람은 백신 접종에 유보적인 때문으로 풀이된다.

크리스토퍼 머리 워싱턴대 의대 보건계량분석연구소(IHME) 소장은 "이런 속도라면 5월 중순이면 백신 공급이 수요를 뛰어넘을 것"으로 예상했다.

실제로 일부 주에서는 백신 공급 과잉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약국정보 플랫폼인 굿알엑스에 따르면 캘리포니아·뉴욕·미시간 등에서 백신 잉여가 급증했다. 카운티(주 아래 행정단위) 1000곳 이상이 백신 공급 과잉 상태라고 한다.

미 행정부는 19일부터 그간의 접종 자격 제한을 해제해 미국 성인이면 모두 백신을 맞을 수 있도록 했지만 시골이나 대도시 할 것 없이 백신 공급이 수요를 초과해 일부 주 정부는 비거주자에게도 백신을 놓아주고 있다고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가 전했다.

연방 정부로부터 공급받은 백신을 절반가량만 사용하고, 나머지를 재고로 보유한 주도 상당수다. CDC에 따르면 앨라배마, 미시시피, 아칸소, 조지아주는 백신 사용률이 각각 62%, 64%, 66%, 67%에 그쳤다. 오하이오주와 조지아주는 수요 부족으로 일부 대형 접종센터의 문을 닫았다.

 미국 뉴욕시는 23일부터 자연사박물관에 '워크인' 코로나19 백신 접종소를 열었다. 박물관 내 접종 공간. [AFP=연합뉴스]

미국 뉴욕시는 23일부터 자연사박물관에 '워크인' 코로나19 백신 접종소를 열었다. 박물관 내 접종 공간. [AFP=연합뉴스]

각 주는 백신 접근성을 높일 묘책을 찾고 있다. 뉴욕시는 23일 미국자연사박물관에 '워크인' 접종소를 열었다. 예약 없이 찾아가도 거대한 푸른고래 모형 아래에서 백신을 맞을 수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백신 인심이 넉넉해지면서 외국인에게도 미국인과 마찬가지로 백신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캐나다와 국경을 접한 노스다코타주는 국경을 넘는 캐나다인 화물트럭 기사에게 무료 백신 접종을 시작했다. 더그 버검 주지사실은 비국적자에게 백신을 접종을 금지하지 않는다는 CDC 의견을 받았다고 밝혔다.

미국 정부는 국적으로 백신 접종을 차별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CDC는 "연방정부는 체류(immigration) 자격과 보험 가입 여부와 상관없이 미국에 거주하는 모든 이에게 백신을 무료로 접종한다"고 밝혔다. 국토안보부도 2월 1일 "미국에 거주(reside)하는 모든 사람은 백신을 맞을 수 있다"고 발표했다.

외국인에게도 백신 접종을 허용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국적이나 신분을 따지지 않고 미국에 체류하는 모든 사람이 맞아야 집단 면역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감염병은 국적을 가리지 않고 전파될 수 있다는 상식에 근거했다.

게다가 백신 공급이 수요를 앞질러 잉여가 예상되는데다 백신을 풀지 않는다는 국제적 비판에 직면한 미국이 이미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에게 야박하게 할 이유도 없어서다.

'백신 관광'은 1년 넘게 개점 휴업 상태인 항공, 호텔, 식당 등 접객업 정상화와 고용 회복에도 긍정적 효과를 줄 수 있다. 알래스카주는 오는 6월 1일부터 앵커리지를 비롯해 4개 공항으로 도착하는 관광객에게 무료 백신 접종을 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미국인과 외국인 관광객을 모두 대상으로 한다. 마이크 던리비 주지사는 지난 16일 "우리는 백신이 있으니 그것을 사용하자는 취지"라면서 "관광객에게 하고 싶은 말은 '6월 1일부터 알래스카에 오면 무료로 백신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알래스카는 연방 정부로부터 공급받은 백신의 71%를 사용하고, 나머지를 보관하고 있다.

멕시코나 남미 부자들의 미국행 백신 여행은 올 초부터 조용히 이뤄지고 있다. 멕시코 유명 방송인 후안 호세 오리겔은 지난 1월 트위터에 플로리다주에서 백신을 맞는 사진과 함께 "백신 맞았다! 고마워요 #USA 조국이 내게 이런 안전을 제공하지 않아 얼마나 슬픈가"라는 글을 올렸다.

연방 정부가 특별히 외국인 접종을 제한하지 않기 때문에 외국인 접종은 개별 주 정책에 따라 결정된다. 보건 정보사이트인 KFF에 따르면 캘리포니아, 텍사스, 네바다, 버지니아 등은 거주는 백신을 맞기 위한 요건이 아니라고 명시하고 있다. 반면 하와이와 뉴욕은 거주자 및 근로자로 제한한다.

백신 무료 접종은 미국인 세금으로 운영된다. 아직은 이를 '활용'하는 외국인 수가 적기 때문에 미국 정부가 눈감아 줄 수 있다. 외국인을 걸러내는 행정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당분간 외국인 접종은 제약 없이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숫자가 급증하고, 백신 접종을 위해 입국하는 외국인 관광객이 코로나19를 전파한다는 인식이 생기면 제한할 가능성이 있다.

백신 접종을 위한 접수 절차는 간단하다. 온라인에서 슈퍼마켓이나 약국 체인에 접속해 이름과 전화번호, 주소, 생년월일, 이메일 주소를 적고, 시간과 장소를 선택하면 된다. 신뢰에 기반한 시스템이기 때문에 주소를 별도로 검증 절차하는 절차는 없다. 접종 현장에선 사진이 부착된 신분증을 제시해야 한다.

워싱턴=박현영 특파원 hy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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