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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여론조사에 물어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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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3호 31면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이럴 거면 비용도 많이 드는 정당정치를 계속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여론조사 기관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열흘 주기로 나오는 대선주자 랭킹 #여론조사 순위에 흔들리는 정치권 #여론조사가 정치적 결정 대신하는 #아주 이상한 정치를 어떻게 하나

요즘 정치는 온통 여론조사에 압도당한 걸로 보인다. 대선은 1년 정도 남았지만, 벌써 열흘 주기로 선호도 조사라는 명목으로 대선 주자들의 순위를 매기는 여론조사 결과가 극성스럽게 발표된다. 이젠 하도 일상화된 터라 며칠 후엔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우린 이미 여론조사 랭킹에 중독 상태다.

금주 초(19일)에 보도된 대선 주자 선호도 여론조사 결과를 보니,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양자 대결을 하면 윤 전 총장이 51.6%로 압승한단다. 여야의 차기 대선 주자 선호도 조사에선 윤 총장이 37.2%, 이 지사는 21%,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11%였다. 이 결과를 놓고 언론마다 앞다투어 논평했다. “야권이 재보선에서 승리한 후 결집하는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이보다 열흘 전인 9일 자로 발표된 내용은 이 지사가 24%, 윤 전 총장이 18%, 이 전 대표는 11%였다. 조사기관은 달랐지만, 이 결과가 나오자 일부 언론은 이렇게 해석했다. “4·7 재보궐선거에서 야권이 압승하면서 문재인 정권에 대한 한풀이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자 윤 전 총장에 대한 지지도가 꺾이고 있다.”

또 이보다 열흘 전인 3월 29일에는 윤 전 총장이 34%를 기록하며 1위로 나섰다고 법석이었고, 두 달 전인 2월에는 이 지사가 압도적 1위였으며, 작년 초만 해도 이 전 대표가 경쟁자 없는 1위 주자였다. 여론조사는 이어진다. 대통령 국정 지지율 조사 역시 앞에 발표됐던 조사의 숫자가 희미해지기도 전에 새 숫자가 발표된다. 2%포인트가 떨어져 위기라고 했다가 금세 며칠 전보다 1.5%포인트 올라 회복세라는 둥, 한 달 새에도 추락과 반등이 현란하게 교차한다.

선데이카툰 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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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조사 결과는 요즘 날씨만큼이나 변덕스럽다. 여론 자체가 지조 없어서 이런 결과가 나올까. 프랑스 정치사회학자 피에르 브르디외는 “여론조사 결과는 여론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많은 정치사회학자는 “여론조사는 반드시 틀린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당부한다.

이들의 말을 증명하려고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는 여론조사 결과의 허망함을 수시로 경험했다. 2016년 4·13총선은 아예 선거 트렌드 자체를 거꾸로 예측했다. 선거결과 예측은 선거 일자가 다가올수록, ‘이럴 수도, 저럴 수도…’하며 예측이 어긋날 때를 대비한 수많은 단서조항이 붙는다. 선진국이라고 더 나아 보이지도 않는다. 영국 브렉시트 국민투표 당시, 투표 당일까지 영국 언론들은 ‘EU 잔류’ 예측을 내놓았다.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투표 당일에도 주요 언론은 힐러리 당선 확률이 90%가 넘는다고 우겼다. 모두 여론조사 결과를 근거로 한 것이었고, 그 결과 땅으로 처박힌 것은 언론의 신뢰였다.

여론조사는 원래 ‘추세’를 예측해보기 위해 신중하게 행하던 보조도구 중 하나였다. 시쳇말로 ‘라떼’ 얘기를 해서 안 됐지만,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여론조사는 상당한 이유가 있을 때, 오랜 준비를 거쳐 행하던 연중행사 같은 것이었다. 신문사에선 창간특집·신년특집과 같은 특집 형태로 여론조사를 준비했고, 이를 위해 조사 전문가와 함께 별도의 팀을 구성해 문항을 신중하게 다듬고 표본을 정하는 등 심혈을 기울였던 기억이 있다.

그에 비하면 요즘 여론 조사는 너무 쉽다. 전문 기업들도 늘었고, 기술이 발전해서일 수도 있다. 그런 한편으론 정치에서 여론조사 수요가 너무 늘면서 수요가 공급을 창출한 측면도 있을 거다. 정가에선 여론조사를 흐름을 읽는 보조도구가 아니라 아예 의사결정 도구로 격상시킨 지 좀 됐다. 2000년대 들어 금품선거를 예방한다며 여론조사 경선을 도입하더니 이젠 아예 국회의원 후보, 시장 후보, 대통령 후보 등 가장 중요한 정치활동에서의 결정 사항을 여론조사에 맡겨버린다.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도대체 이렇게 변덕스러운 여론조사가 어떻게 정치적 결정을 대신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한국 정치가 본래 지조가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대놓고 지조 없는 여론조사에 의존하는 걸 자랑삼는 건 너무 황당하지 않은가. 이 판국에 원론적인 얘기 하나 해보자. 정당이란 특정 목적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모여 그들의 목적의식에 동의하는 국민의 지지를 받아 권력을 창출하고,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사회를 위한 정책을 추진하는 정치결사체다. 그러니 사회적·정치적 목적에 대한 합의가 중요하고, 권력도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추구한다고 알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요즘 벌어지는 ‘풍경’은 정말 이상하다. 아직 정치참여 의사도 밝히지 않은 윤 전 총장이 여론조사 1위를 달리자 제1야당, 제삼지대까지 그를 대선 후보 1순위로 꼽는다. 윤 전 총장의 인물론은 차치하고, 우리는 그의 정치적 의지, 목적의식, 그가 지향하는 정치적 이상에 대해 들어본 일이 없다. 그런데도 ‘닥치고 대선 후보’란다. 이 대목에서 궁금하다. 권력 쟁취 빼놓고, 우리 정치가 지향하는 이상은 무엇인가. 정치권은 여론조사 말고 정치할 실력은 있는가. 여론조사가 판단을 대신하는 이런 ‘무뇌정치’를 우린 언제까지 참아야 하나.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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