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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6 수장 맡을 뻔한 엘리트, 소련 이중간첩으로 30년 암약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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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3호 22면

[세계를 흔든 스파이] 조국 배신한 ‘금수저’ 킴 필비

영국 상류층 출신으로 정보기관에 들어가 소련 이중 스파이로 암약했던 킴 필비. [중앙포토]

영국 상류층 출신으로 정보기관에 들어가 소련 이중 스파이로 암약했던 킴 필비. [중앙포토]

1963년 1월 23일 이른 아침 중동국가 레바논의 베이루트 항에서 소련 화물선 돌마토바호가 소련 오데사 항을 향해 출항했다. 얼마나 급하게 떠났는지 화물도 싣지 않고 부두에 남겨뒀을 정도였다. 그날 저녁 베이루트의 레바논 주재 영국 대사관에선 혼란이 벌어졌다. 영국 대사관 1등 서기관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 예정이던 영국 해외정보기관 MI6 요원인 킴 필비가 나타나지 않고 종적을 감췄기 때문이다. 의아해하는 부인만 남겨둔 채 소련 이중 스파이인 필비가 모스크바로 망명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 직전에 벌어진 일들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나온 최상류층 #출신·능력 좋아 아무도 의심 안 해 #특급기밀 빼돌리고도 초고속 승진 #한국 전쟁 때 워싱턴 연락관 근무 #연합군 작전 정보 소련 전달 의혹 #1963년 모스크바 망명 가면 벗어

배신자의 상징  ‘케임브리지 5인조’ 오명

필비는 영국 상류층 출신으로 최고의 교육을 받은 특권층이었다. 그런 필비가 조국을 배신하고 소련을 위해 일하는 이중 스파이로 암약하다 모스크바로 망명한 것에 영국 사회는 물론 서방 세계 전체가 큰 충격에 빠졌다. 소련이 이념 전쟁과 정보 대결에서 승리했음을 의미했다.

필비의 MI6 경력을 보면 당시 서방 세계가 받은 충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40년 해외정보기관인 비밀정보국(SIS)에 들어갔다. 국내정보기관이자 감찰기관인 MI5에 대비해 MI6로 불리는 조직이다. 냉전 당시 소련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공산주의자들의 대서방 정보활동을 막으면서 공산주의 세력과 상대하는 최전선 기관이었다.

충성스러운 고위 공직자 집안 출신으로 영국 최고의 학교인 웨스트민스터와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 칼리지를 마친 필비는 MI6에서 승승장구했다. 41년엔 MI6 방첩부서 근무를 시작했다. 민간인으로 위장해 영국에서 암약하는 소련 스파이나 동조자를 색출하는 게 기본 임무였다. 소련 정보기관이 어떤 활동을 하는지를 파악하고, 여기에 대응해 어떤 공작을 펼치고 어떤 이중 스파이를 어떻게 보낼지도 이 부서가 담당했다.

이미 34년 소련 스파이로 포섭됐던 필비가 그 일을 맡은 것은 그야말로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맡은 격’이었다. 하지만 그의 출신이나 능력 때문에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당시 그가 소련에 제공한 정보로 영국이 심어둔 비밀정보원이나 이중 스파이가 발각돼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 가능성이 크다.

필비는 47년 터키 이스탄불에 파견돼 대소련 공작 업무를 현장에서 담당했다. 터키와 국경을 맞댄 소련의 아르메니아 공화국 등지에 이중 스파이를 파견하는 업무를 맡았다. 터키는 소련과 국경이 맞닿은 최전방이었다.

KGB 근무하며 20세 연하 새 부인과 결혼

킴 필비의 삶

킴 필비의 삶

이중 스파이 활동의 하이라이트는 49년 주미 영국 대사관에 연락관으로 파견된 것이었다. 미국의 해외 정보기관인 중앙정보국(CIA)과 정보 교류를 하는 것은 물론 정보와 공작을 조율하는 미·영 관계의 요직 중의 요직이다. 필비는 방첩부서 요원과 주미 연락관을 거치면서 장래 MI6의 국장 후보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출신과 능력을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로 보인다.

주목할 점은 그가 미국 워싱턴에 근무하던 50년에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는 점이다. 미국은 소련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개전 즉시 개입을 결정했고 그해 6월 27일 첫 파병을 했다. 동맹인 영국은 미국에 가장 먼저 동조해 이틀 뒤인 6월 29일 홍콩에서 병력을 파병했다. 한국 전쟁에서 미국은 연인원 178만 9000명의 병력을 파병해 3만6940명의 전사자를 냈고 영국은 그 다음으로 많은 5만6000명을 보내 1078명의 희생을 치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미국과 비밀 정보를 교류하고 조율하는 핵심 자리인 워싱턴 주재 연락관을 필비가 맡았으니 참으로 오싹할 일이다. 필비는 인천상륙작전 뒤 북한 지역으로 공격해 들어간 연합군이 중국 지역인 만주로 교전을 확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소련에 전달했을 것으로 의심받는다. 이는 중국이 만주 지역에서 안심하고 보급이나 소련 전투기 출격 임무를 맡는 데 큰 도움을 줬을 것이다. 자국 국경에 안전함을 확인한 중공군은 개입을 더욱 확대했을 수도 있다.

6·25전쟁이 한창일 때 필비가 소련에 전한 서방의 정보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전모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정보 세계의 특성상 영원히 미제일 수 있다. 그의 반역으로 당시 전쟁을 치르던 한국인을 비롯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불행해졌는지는 계산하기조차 불가능하다. 필비가 이중 스파이로서 소련에 제공한 정보가 한국 전쟁 중 한국 국민과 국군, 그리고 연합군의 희생과 비극을 더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모스크바의 무덤에 있는 필비의 비석. [중앙포토]

모스크바의 무덤에 있는 필비의 비석. [중앙포토]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51년 MI6 요원인 도널드 맥클린(1913~1983)과 가이버지스(1911~1963)가 모스크바로 망명했다. 이들은 필비와 함께 소련에 포섭돼 주요 정보를 넘긴 케임브리지 파이브의 일원이다. 배신자는 혼자 일하지 않았다.

필비는 이 사건으로 의심받다 보직에서 해임되자 MI6를 떠났다. 하지만 혐의가 드러나지 않자 베이루트에서 기자로 위장 근무하는 형식으로 56년 MI6에 복직했다. 그는 63년 소련으로 망명해 드디어 가면을 벗었다.

케임브리지 파이브의 반역은 정보활동과 더불어 적의 활동을 막는 방첩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역사의 교훈이다. 79년에는 케임브리지대 출신의 저명한 미술사가 앤서니 블런트(1907~1983) 교수가 이중 스파이 활동을 했다고 자백하면서 기사 작위가 취소됐다. 블런트는 케임브리지 파이브의 한 명으로 지목된다. 나머지 한 명이 누군지는 아직도 불분명하다.

필비는 KGB 대령으로 모스크바의 국가 제공 아파트에서 살다 88년 현지에서 사망했다. 모스크바에서 결혼한 20살 어린 부인과 ‘특권층 배신자’라는 오명을 남겼다. 그가 충성했던 새 조국 소련은 그가 죽은 지 2년 뒤인 91년 12월 26일 공산주의 체제와 함께 무너졌다.

자본주의 대공황에 실망, 배신의 온상이 된 케임브리지대

영국 상류층 출신의 킴 필비는 왜 배신의 아이콘이 됐을까. 1968년 『나의 조용한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발간된 자서전에서 필비는 “내 삶의 목적은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필비의 출신과 교육을 보면 자본주의 파괴가 아니라 수호를 맡는 인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는 12년 영국 식민지이던 인도의 펀잡주암팔라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식민지 관리로 인도·중동에서 활동했다. 그 덕분에 필비는 어려서 아버지와 요르단에서 지내며 현지 베두인 부족과 사막의 밤을 보내기도 했다.

필비는 영국의 명문 사립학교인 웨스트민스터 칼리지에 들어갔다. 웨스트민스터 칼리지는 런던의 국회의사당과 웨스트민스터 사원 사이에 자리 잡은 학교다. 영국 최상류층의 머리 좋은 자제들을 가르쳐 지도자로 배출하는 엘리트 양성학교다. 영국의 엘리트 사립학교를 말하면 흔히 런던 교외의 윈저성 근처에 있는 이튼 칼리지를 떠올리지만, 웨스트민스터야말로 학생들의 출신과 성적이 최고 중의 최고로 평가된다.

그런 필비는 왜 그랬을까. 그가 케임브리지 대학에 들어간 29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는 대공황이 막 시작돼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회의론이 제기되던 시기였다. 수많은 기업이 무너지고 실업자가 양산됐다. 빈부 격차가 커지면서 가난한 노동자들이 최대의 피해자가 됐다.

그런 상황에서 영국의 지식인과 대학생들은 공산주의를 하나의 대안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필비는 케임브리지대 사회주의 학습단체에 가입하고 공산주의 이론을 공부했다. 대학생 필비는 당시 공산주의 이론에 심취하면서 ‘배신자’로서 자신의 진로를 정한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독일에선 나치즘이 고개를 들었으며 나치는 33년 선거로 권력을 장악했다. 33년 대학을 졸업한 필비는 당시 케임브리지대 경제학 강사였던 모리스 돕의 추천으로 반파시즘 단체에서 일하게 됐다. 그는 오스트리아로 가서 나치를 피해 온 유대인들을 만나면서 충격을 받았다.

소련은 그런 그를 놓치지 않았다. 34년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 소련 스파이인 아르놀트 도이치를 만나 포섭됐다. 도이치는 케임브리지대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영국 상류층 학생 중에서 소련을 위해 일할 스파이를 모집했다. 영국의 행정부나 정보기관에 자리를 잡게한 뒤 나중에 고위직에 오르면 생생한 정보를 얻는, ‘입도선매’식 스파이망 구축이었다. 소련이 얼마나 장기간에 걸쳐 서방 세계에, 그것도 정보기관의 의심을 받지 않고 최고의 핵심부에서 정보를 얻기 위해 끈질기게 ‘선 투자’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사례다.

필비는 대학 시절 공산주의를 함께 공부하던 도널드 맥클린과 가이 버지스를 도이치에게 소개했다. 이들을 포함해 다섯 명으로 추정되는 케임브리지대 출신의 소련 이중 스파이 조직인 ‘케임브리지 파이브’가 구성되던 순간이다. 이들은 모두 MI6에 들어가 소련의 이중 스파이로서 영국과 미국의 정보를 소련에 넘겼다. 출신으로 성향을 판단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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