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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발니 생사 위기…미 “대가 치를 것” 러 “선 넘지 말라” 맞짱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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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3호 12면

미·러 정면충돌

지난 21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한 시민이 ‘나발니에게 자유를’이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나발니 석방 촉구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21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한 시민이 ‘나발니에게 자유를’이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나발니 석방 촉구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연합뉴스]

미국과 러시아 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지난 1월 조 바이든 미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모양새다. 양국은 상대국 외교관을 추방하고 주요 인사들에 대해 입국 금지 조치를 내리는 등 강하게 충돌하고 있다. 미국이 지난해 미 대선 개입과 연방기관 해킹 의혹, 우크라이나 문제 등을 거론하며 러시아를 비난하자 러시아도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며 반발하고 나섰다.

옥중 단식 나발니, 심장마비 위험 #러 29개 도시서 석방 촉구 시위 #바이든 “푸틴은 살인자” 맹공격 #푸틴 “미국도 인디언 학살” 비난 #외교관 10명 맞추방, 대사도 소환 #정상회담 제의 등 돌파구 열어둬

최근엔 이 같은 양국의 정치·외교적 갈등에 러시아 야권 운동가인 알렉세이 나발니 문제가 기름을 부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최대 정적인 나발니는 지난해 8월 항공기 안에서 독극물에 중독돼 독일에서 긴급 치료를 받았다. 지난 1월 주위의 만류에도 고국인 러시아로 돌아간 나발니는 귀국 직후 체포돼 수감됐고, 이후 열린 재판에서 2014년 사기 혐의로 받은 집행유예가 3년 6개월의 징역형으로 바뀌었다.

변호사 출신인 나발니는 야권의 존재감이 거의 없는 러시아에서 푸틴 정권에 맞서 싸운 사실상 유일한 야권 운동가로 꼽혀 왔다. 2017년엔 대규모 반부패 시위를 주도했고 푸틴 대통령의 재출마 길을 열어준 지난해 개헌에 대해 ‘쿠데타’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런 만큼 나발니 수감은 러시아 반정부 투쟁의 상징인 나발니를 옥죄기 위한 러시아 당국의 강수로 해석됐다. 나발니는 이에 항의하며 지난달 31일부터 옥중 단식에 돌입했고 최근 건강이 크게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주엔 “나발니의 생명이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는 유엔 인권 전문가들의 우려가 흘러나오면서 러시아 전역에서 나발니 석방 촉구 시위가 벌어졌다. 지난 21일에는 수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노보시비르스크 등 전국 29개 도시에서 1만4000명 이상이 거리로 뛰쳐나와 “나발니를 석방하라”고 외쳤다. 비정부기구 ‘OVD-인포’에 따르면 이날 시위에서 체포된 사람만 1600명에 달했다.

현재 나발니의 건강은 사망이 우려될 정도로 위험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AFP통신은 나발니 주치의를 인용해 “치명적인 부정맥과 심장마비로 인해 언제든 사망할 수 있는 상황”이라며 “혈중 칼륨 수치 등을 감안할 때 지금 당장 중환자실로 이송해야 한다”고 전했다.

바이든 정부도 나발니의 신병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나발니에게 발생하는 일은 러시아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며 “우리는 취할 수 있는 구체적 조치를 검토하고 있으며 그가 죽게 된다면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22일 열린 기후정상회의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연설을 지켜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22일 열린 기후정상회의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연설을 지켜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처럼 나발니 문제는 바이든 정부의 러시아 정책에서 최대 현안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표면적인 명분은 러시아 민주주의 수호와 인권 보장이지만 그 이면엔 ‘푸틴 흔들기’라는 숨은 그림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그동안 미 정부가 제기한 대선 개입과 해킹, 우크라이나 문제 등도 같은 맥락이란 설명이다.

AP통신은 “바이든 대통령은 푸틴 정권의 세력 약화가 미국이 국제사회의 리더 지위를 되찾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며 “동시에 미국 내에서의 반러시아 정서 확산을 통해 정치적 입지 강화도 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러시아 때리기로 트럼프 정부와 차별화하고 이를 통해 정치적 이익도 얻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나발니 문제를 통해 푸틴 대통령이 반민주적 지도자라는 점이 부각될 경우 러시아 내에서의 반푸틴 운동을 독려하는 효과를 얻을 수도 있다.

뉴욕타임스는 “러시아에 우호적이었던 트럼프 대통령과 달리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와 적대적 관계를 설정함으로써 얻는 정치적 이익이 더 클 것으로 계산하고 있다”며 “국제사회를 리드하는 미국의 위상을 되찾으려는 바이든의 전략상 러시아와의 대립각은 당분간 불가피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미국은 최근 자국 주재 러시아 외교관 10명을 추방하고 러시아의 사이버 해킹을 지원한 6개 업체 등을 제재 대상에 올렸다. 이에 러시아도 미 외교관 10명을 맞추방하고 메릭 갈런드 미 법무장관 등 전·현직 고위 인사 8명의 러시아 입국을 전면 금지했다. 이에 더해 양국은 상대국 주재 자국 대사를 본국으로 불러들인 상태다.

푸틴 대통령도 강하게 맞서고 있다. 21일 국정연설에서는 “레드라인을 넘지 않길 바란다. 그 경계가 어디인지는 우리가 정한다”며 “러시아의 안보 이익을 위협한다면 한 번도 해보지 못한 후회를 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대해 AFP통신은 “지금 푸틴의 러시아는 구소련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양국 간의 긴장은 바이든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의 개인적 비난으로 확산됐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A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푸틴 대통령을 살인자로 보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이에 푸틴 대통령도 미국의 인디언 학살과 노예제 등 역사적 사건까지 거론하며 바이든 대통령에게 맞장토론을 제안했다.

그렇다고 미·러 관계가 꽉 막힌 것만은 아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에게 올여름 제3국에서 대면 정상회담을 하자고 제안했고, 푸틴 대통령도 바이든 대통령의 초청에 응해 지난 22일부터 이틀간 화상으로 열린 기후정상회의에 참석했다. 당장 미·러 관계가 개선되기는 어려울지라도 양국 정상의 태도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상대국의 협력이 필요한 사안도 작지 않다. 양국 간 전략적·군사적 균형과 군비 통제를 비롯해 이란 핵과 아프가니스탄 문제, 글로벌 기후변화 공동 대처 등이 대표적이다. AFP통신은 “지금의 미·러 갈등은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러시아를 다시 글로벌 슈퍼 파워로 끌어올리겠다는 푸틴과 국제사회의 리더 국가로 복귀하려는 바이든의 이해관계가 정면충돌한 데 따른 것”이라며 “양국 정부가 위기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갈등의 양상이 달라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최익재 기자 ij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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